김창열에게 물방울은 6·25 상흔 치유의 상징이었다

입력 2025-10-22 00:10
‘물방울 작가’ 김창열이 1971년에 처음 그린 ‘물방울’(캔버스에 아크릴릭 물감, 50×50㎝). 그가 평생 천착한 소재인 물방울은 전쟁의 상처를 꿰매는 실존적 동반자였다. 다른 사진은 물방울의 탄생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창열(1929∼2021)은 ‘물방울’의 작가다. 그가 타계했을 때 프랑스 르몽드지는 파리에서 활동한 이국의 화가를 추모해 그가 그린 물방울 이미지를 입힌 부고 기사로 죽음을 애도했다. 파리 교외 마구간 작업실을 마침내 벗어나 시내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자 문패에 이름 대신 물방울 하나를 그렸던 화가. 그래서 물방울씨라는 뜻의 ‘무슈 구뜨 도’라 불렸던 화가. 그에게는 평생 물방울만 그린 작가라는 평가가 따른다. 이는 작가의 정체성을 요약해 보여주기도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오명이기도 하다. 작가는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질문을 달리 해보자. 무엇이 작가로 하여금 평생 물방울을 그리게 했을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 중인 ‘김창열’ 회고전은 이 질문에 답한다. 김창열을 상징하는 ‘물방울’로 향하는 예술적 전환 과정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대표작과 초기작 및 뉴욕시기 등 미공개 작품 31점을 포함해 120여 점이 대거 나왔다.

긴 여정의 출발은 1967년 그린 미공개작으로 시작한다. 캔버스에 회색톤으로 두껍고 구불구불한 선이 이어진 추상화다. 그 붓질에 내 살갗이 베이는 아픔이 느껴져 순간 오싹하게 되는 그림. 작가는 이 작품 캔버스 뒷면에 영어로 ‘살과 영혼’(flesh and spirit)이라고 적었다. 그가 1960년대에 그린 회화들은 검거나 붉고 누런 바탕에 울퉁불퉁 선이 가로로 철망처럼 그어져 있다. 내 몸을 자학하듯 말이다. 어떤 회화에는 총 맞은 살갗처럼 구멍이 있다.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렸다. 근원은 거기다.”

작가의 인생 초기 상처를 긁는 듯 선으로 제의적 제스처를 취한 앵포르멜 추상 ‘제사’(1964, 캔버스에 유화 물감, 180×325㎝).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훗날 작가가 쓴 이 문장은 초기 ‘제사’라고 이름 붙인 두껍고 끈적끈적한 앵포르멜 추상화가 한국전쟁기 살아남은 자로서 죽은 자들에게 바치는 제의적인 의식임을 짐작케 한다.

김창열은 평안남도 맹산에서 태어나 홀로 남하했다. 서울대 미술대학에 진학한 그는 한국전쟁이 터지며 학업을 중단하고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했다. 제주에 파견돼 1년 6개월간 경찰전문학교 도서관에 근무했다. 그가 경찰로 근무하던 때는 1947년부터 1954년까지 이념 갈등에 따라 공권력에 의해 무고한 주민이 희생된 제주의 비극 4·3사건이 일어난 시기와 겹친다. 그 사건이 화가 인생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을 거로 짐작 된다.

뉴욕 시기가 없었다면 물방울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김창열은 1965년 국제조형예술협회 런던 총회에 참석하던 중 동료 화가 김환기의 연락을 받고 뉴욕으로 가게 됐다. 거기서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아 1966년 뉴욕 아트 스튜던츠 리그 판화과에 등록해 3년여 지내게 된다.

“전쟁의 고통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악몽과 같았다”고 회고할 만큼 뉴욕의 새로운 미술에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한국에서 유행한 앵포르멜 회화는 뉴욕에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느낀 정서적 이질감은 그에게 깊은 소외감과 회의를 안겼다.

1966년 이후 뉴욕에 체류하며 그린 기하학적 추상 연작.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새로운 전환을 모색한 그는 옵티컬 아트의 영향을 받아 매끈한 기하학적 추상을 선보였다. 즉 색띠에 둘러싸인 구형, 착시적 원근감, 그리고 내부의 응축된 현상이 확장하는 듯한 화면이 뉴욕 시절의 캔버스를 채웠다.

1969년 파리 정착 이후 제작된 것으로, 기하학적 추상이 액화돼 물방울의 전조 같은 ‘현상’ 연작.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김창열은 1969년 파리로 이주했다. 이때부터였다. 초기 상처를 내듯 길게 그어진 선들이 갑자기 차가운 공기를 만나 응축돼 점액질처럼 녹아내리는 형상이 등장했다. 또 딱딱하고 추상적인 구체가 유기적 덩어리로 변모해 끈적이는 점액질처럼 흘러내리기도 했다. 물방울의 전조 같은 이 작품이 인체의 장기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작가는 ‘창자 미술’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살점을 긁어낸 듯한 다분히 표현성을 띤 점들이 뉴욕의 냉랭한 공기에 씻겨 냉각되었다고나 할까요.(중략) 내면의 뜨거운 응어리들이 점차 응결되고 냉각되어 공같이 된 흰 구체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파리 외곽의 마구간을 개조한 누추한 작업실에서 지내던 그는 캔버스 천을 재사용하려고 뒷면에 물을 뿌렸다. 거기에 물방울이 맺었고 그는 발견의 기쁨에 전율했다. 뉴욕 시기를 거치며 축적된 조형적 실험, 그리고 오랜 기간 내면의 고통과 실존적 불안이 물방울 형상으로 응축됐다. 영롱하게 맺힌 물방울이야말로 그가 갈구해마지 않은 상처의 승화, 치유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최초의 물방울 작품으로 알려진 ‘밤에 일어난 일’(1972)보다 앞서 제작된 1971년의 물방울 회화 2점이 최초 공개된다.

1973년 파리에서 연 첫 개인전에는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도 다녀갔다. 방명록에 “이것은 뻬르삐냥역처럼 웅장하다”고 극찬했다. 이어 우리가 익히 아는, 극사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오가는 물방울 작업의 다양한 변주를 전시장에서 볼 수 있다.

1971년 시작한 물방울 연작은 타계할 때까지 지속됐다. 50년 이어간 동력에 대해 전시를 기획한 설원지 학예연구사는 “한국전쟁 중 여동생이 눈앞에서 죽고, 총알이 귀밑으로 지나가는 경험을 통해 실존적 공포를 느꼈다. 물방울은 삶의 상처를 꿰매는 진혼의 행위이자 실존적 동반자였다”고 해석했다. 12월 21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