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권분립 무시하고 사법부 압박하는 여권
민주주의 가치와 정의, 법치 위협한다
권력 간 견제와 균형 깨지면 독단으로 흐를 위험성 커
민주주의 가치와 정의, 법치 위협한다
권력 간 견제와 균형 깨지면 독단으로 흐를 위험성 커
“법관에게 정의란 영원한 짝사랑이다. 궁극의 이데아다.” 사법연수원 첫 강의에서 정의를 좇는 것이 법조인의 사명임을 설파했던 교수는 세월이 흘러 사건의 진실을 찾고 비리를 파헤치려는 제자 검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한테 있어서 정의는 나와 내 가족의 안전이다. 이 정도 살아보니까 그 이상의 정의는 없다.” 법무부 장관까지 올랐다가 억울하게 뇌물수수 혐의를 쓰고 물러난 뒤 거대하고 공고한 카르텔에 무력감을 느끼고 침묵을 택한 노 교수의 항변이다. 몇 년 전 방영된 드라마 ‘비밀의 숲’의 한 장면이다.
요즘 정치인들을 보면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 좇는 직업군 같다. 1970, 80년대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던 젊음이 있었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더 정의로운 세상, 모두가 행복한 더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서로의 어깨를 걸고 목이 터져라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부당한 탄압과 폭력에 항거하며, 부정부패와 비리 사슬을 끊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어둡고 긴 밤이 지나면 찬란한 아침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모진 고문도 견디던 시절이다. 그들의 값진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가능했다.
당시 민주화 시위를 주도했던 대학 총학생회장들이나 민주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상당수가 정계나 법조계에 진출해 586(50대, 80년대 학번, 1960년대생), 686이 됐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끌어가고 있다. 이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소명의식을 갖고 있을까. 상당수는 특권과 고액 연봉을 누리기 위해 금배지를 달았을 것이다. 나는 세상과 적당히 타협하고 변해도 그들은 상록수처럼 변하지 않고 정의를 지키는, 우리의 우상으로 남아주길 기대했나 보다. 그렇기에 그들이 주역을 맡은 정치 무대가 더 실망스럽게 느껴지는 것일 터다.
정의의 가치와 법치가 무색하다. 민주주의는 입법, 사법, 행정 3개 권력의 상호 견제와 균형을 기반으로 성장해 왔다. 어느 한쪽에 권력이 치우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한쪽 권력이 잘못된 방향을 잡더라도 나머지 두 권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면 사회 붕괴를 막을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에 삼권분립을 명시해 놓은 이유다. 그런데 이 정부는 선출된 권력이 우위에 있다며 사법부를 능멸하고 있다. 국정감사장에 조희대 대법원장을 출석시켜 망신 주는가 하면 일부 여당 국회의원은 현장검증을 핑계로 대법원을 휘젓고 다니며 쇼츠 영상까지 찍어 유튜브에 올렸다. 대통령에게 잘 보이고 열성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인기영합주의다. 조국혁신당은 대법원장 탄핵소추안까지 공개하며 대법원장 퇴진을 압박하고 있다.
대선을 앞둔 지난 5월 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이재명 대통령에 대해 선거법 위반 혐의 유죄 취지 판결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눈엣가시인 대법원장을 찍어내려는 것은 대법관 증원, 검찰청 해체와 함께 아직 사법리스크를 벗지 못한 이 대통령을 구하기 위한 수순이라는 것을 국민은 안다. 그동안 사법부가 최고권력자의 입김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논란을 자초한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진행 중인 재판에 대해 매번 대법원장이나 판사를 불러 왜 그랬는지를 일일이 따져 묻는다면 법관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물론 재판의 독립을 보장할 수 없다. 사법부를 권력의 시녀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사법부를 흔드는 것을 당장 그만둬야 한다.
“지금까지 대법원장이 직접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던 것은 대법원과 국회, 행정부라는 삼권분립의 큰 원칙에 따라 대법원을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다. 이번 사건이 어떤 빌미가 돼 이런 전례가 생긴다면 앞으로 전체 재판 관계의 문제까지도 질의해야 하는 사태가 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야당 의원 발언이 아니다. 2018년 문재인정부 때 김명수 대법원장의 국감 증언 여부를 놓고 여야가 충돌했을 때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 법사위 간사 송기헌 의원이 한 말이다.
이재명정부는 그 어느 정권보다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다. 야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거대 여당의 힘으로 정부조직개편안, 노란봉투법 등을 일사천리로 밀어붙였다. 여기에 명실공히 사법권까지 장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두렵다. 윌리엄 피트 전 영국 총리는 “법이 끝나는 곳에서 폭정이 시작된다”고 했다.
이명희 논설위원·종교전문기자 mhee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