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터지는 퇴직연금 수익률… ‘기금화’가 해법 될까

입력 2025-10-21 00:08
게티이미지뱅크

“퇴직연금 시장 규모가 2030년이 되면 1000조원으로 늘어납니다. 이를 기금화해 대형 투자를 가능하게 하면 대한민국 자본시장 전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의장은 지난달 30일 한국거래소에서 열린 ‘자본시장 현장 간담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는 사용자와 노동자가 공동으로 독립된 기금법인을 설립하고 해당 법인이 퇴직연금을 책임지고 운용한다. 기업이 금융회사와 개별 계약을 체결해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기존의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와 차이가 있다.

민주당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최근 ‘퇴직연금 개선방안’을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진행하면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에 착수했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도 지난달 국회 대정부질문에서 “퇴직연금은 개인적으로 공적기관에 수탁하는 방법이 제일 안정성과 수익성을 높일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기금화로 가입·수익률 높여야”

정부 여당이 퇴직연금 지배구조 개선 논의에 착수한 것은 기존 퇴직연금이 공적 장치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됐다. 21일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지난해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431조7000억원으로 2023년 대비 12.9% 증가했지만 최근 5년 수익률은 2%대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전체 사업장 중 퇴직연금 도입 비율도 27%로 낮았다.

기금형 퇴직연금 논의는 기존에도 있었다. 현대차증권에 따르면 2014년 고용노동부가 ‘사적연금 활성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단일기업형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 도입을 제안했다. 2016년과 2019년 등에도 관련 논의가 이어졌으나 이해관계자들의 반발 등으로 무산됐다. 그러다 지난해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이 포함된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국회에서 발의되고 이재명 대통령이 대선 공약에 이를 포함하면서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일본·영국, 계약·기금형 병존

현재로서는 기존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를 그대로 두고 추가로 기금형을 도입하는 방안이 비중 있게 논의되고 있다. 확정급여형(DB), 확정기여형(DC), 개인형퇴직연금(IRP)으로 나뉘는 기존 계약형 모델에 기금형이라는 선택지를 추가하는 셈이다.

이러한 공존형 모델을 도입한 대표 국가가 일본과 영국이다. 일본은 단일기업 단위의 기금이 퇴직연금을 운용하고 기금이사회가 운용 방향 등을 설정한다. 영국도 기금운용위원회를 두고 있다. 영국의 퇴직연금은 DB 기금형 제도를 중심으로 발달하다가 2000년대 이후 특히 2012년 ‘자동 가입 제도’(일정 요건을 갖춘 근로자가 사업주 동의 없이 의무적으로 퇴직연금에 가입시키는 것) 도입 이후 DC가 본격적으로 확산했다. DC 기금형 중에서도 둘 이상의 기업이 하나의 DC형 퇴직연금에 공동 가입하는 연합형 기금인 ‘마스터 트러스트’를 중심으로 성장이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중소기업을 위해 영국 정부가 설립한 ‘NEST(National Employment Saving Trust)’도 기금형 퇴직연금 중 하나다. 이 제도를 벤치마크해 도입한 것이 한국의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푸른씨앗)이다.

이 외에도 미국이나 호주 등도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가 도입돼 있는데, 이 국가들은 병존형이 아닌 기금형 하나의 모델만 채택했다. 미국의 경우 ‘401(k)’가 대표적인 기금형 DC 제도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410k는 2006년 연금보호법 개정에 따른 자동가입 조항 시행으로 활성화 기틀이 마련됐다”며 “이 제도로 적립금이 대규모 유입되면서 증시 상승압력으로 작용했고 이것이 퇴직연금 가입자들의 부를 늘리는 선순환 구조로 자리 잡게 됐다”고 설명했다.

단 현재 한국에서 논의되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와 미국, 호주의 기금형 제도는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은 기금형 퇴직연금을 수탁법인이 운용하게 하는 방향으로 검토가 이뤄지고 있는 반면 미국과 호주는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라고 하더라도 개인이 운용 상품을 선택할 수 있고 이에 따라 기금형 제도 내에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도 선택할 수 있다.

기금화 찬반 의견 ‘분분’

금융투자업계에서도 퇴직연금 제도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현대차증권의 한국과 미국의 퇴직연금 비교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금융기관 위탁, 원리금 보장 위주인 반면 미국은 신탁 기반의 자산 운용과 수탁자 책임 경영이 발달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김중원 연구원은 “한국은 ‘퇴직금은 꼭 줘야 해’ 단계라면 미국은 ‘은퇴 후 먹고살 자산을 키우자’라는 단계에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기금형 퇴직연금 제도기 수익률 제고와 자본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면서도 대규모 기금이 주식시장의 본질인 기업의 가치를 뛰어넘는 고평가를 만들면 큰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준서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금화가 되면 현재보다는 조금 더 위험을 감수하는 방향으로 퇴직연금이 운용될 것이기 때문에 수익률 측면에서는 플러스가 될 것”이라며 “다만 거대한 기금이 자본시장에서 역할을 하게 될 경우 자산 가격이 과하게 올랐을 때 큰 조정을 맞는 시나리오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금투업계 관계자는 “국회에서 기금형 퇴직연금 도입 논의가 ‘계약형 퇴직연금 제도를 채택해서 수익률이 낮다. 그러므로 기금형을 도입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단순하게 흘러가는데 수익률을 높이려면 그보다 디폴트옵션 등을 개선하는 게 먼저”라고 말했다.

장은현 기자 eh@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