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8위 HD현대그룹이 정기선 회장 체제로 공식 전환했다. 37년 만의 ‘오너 경영’ 복귀다. HD현대는 국내 30대 그룹 총수 중 최연소(43세)인 정 회장 중심의 ‘세대교체’를 통해 사업경쟁력 강화와 미래 사업 확대에 속도를 올릴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HD현대는 지난 17일 정기선 수석부회장을 회장으로 승진시키는 인사를 단행했다. 지난해 11월 수석부회장에 오른 지 1년 만에 그룹 수장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로써 HD현대는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에 이은 ‘3세 오너’ 경영 체제에 들어갔다. 대주주인 정 이사장이 1988년 정계에 진출하면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이후 유지돼온 전문경영인 체제는 막을 내리게 됐다.
정 회장은 이번 인사로 그룹 지배구조 상단에 위치한 HD현대(지주사)와 HD한국조선해양(중간지주사) 함께 HD현대사이트솔루션의 대표이사까지 맡게 됐다. 조선·건설기계 등 그룹 내 핵심 사업을 진두지휘하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이번 인사는 HD현대그룹 내부의 대규모 사업재편이 마무리되는 시점이 이뤄졌다. 조선 부문에서 HD현대중공업과 HD현대미포, 건설기계 부문에서는 HD현대건설기계와 HD현대인프라코어가 합병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정 회장이 그룹 경영 전반에서 자신의 색깔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시점이 아닌가 싶다”고 평가했다.
정 회장은 조선 사업 고도화와 동시에 사업 혁신을 통한 미래 성장 동력 확보, 신사업 발굴 등 ‘뉴 HD현대’ 구축에 공을 들일 것으로 전망된다. 그는 조선 부문에서 필리핀·인도·페루 등에서의 생산 야드를 확장하고, 한국 조선업 첫 해외 진출 기지인 HD현대베트남조선을 세우는 등 글로벌 사업 재편을 이끌어 왔다. 또 HD현대마린솔루션을 직접 출범시켜 창립 당시 2400억원에 불과했던 연 매출을 올해 1조7000억원까지 성장시켰다.
인공지능(AI), 소형모듈원자로(SMR) 등 분야에서의 미래 비전도 제시될 수 있다. 정 회장은 지난해 세계 최대 가전·IT 전시회인 기조연설자로 나서 ‘AI와 디지털, 로봇 등 첨단기술’을 HD현대 기술에 접목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SMR 분야에서는 테라파워의 빌 게이츠와 손 잡고 SMR 추진선 개발을 진행 중이다.
업계에서는 정 회장 체제의 출범이 곧 HD현대의 본격적인 경영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한·미 조선 협력 프로젝트 ‘마스가(MASGA)’ 등에서 주축 역할을 하면서 그룹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그의 경영능력이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랐다는 평가도 나온다.
HD현대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그룹의 의지를 담은 것”이라며 “기존 사업의 성장뿐 아니라 전 분야 혁신을 통해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도약을 이끌어 낼 것”이라고 말했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