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알려진, 알려지지 않은’ 이자익 목사의 진실, 전기에 담다

입력 2025-10-20 03:03 수정 2025-10-20 09:14
전북 김제 금산교회 기역자 한옥 예배당(왼쪽)과 예배가 드려진 교회 본당.

부슬비가 종일 내리던 18일 빗물을 잔뜩 머금어 고동색으로 변한 나무 종탑이 전북 김제 금산교회(김종원 목사) 입구에서 성도들을 맞이했다. 고동색 십자가 종탑을 마주한 ‘ㄱ(기역)자형 예배당’ 기와 처마 끝으로 빗물이 고여 뚝뚝 떨어졌다.

이자익목사기념사업회(이사장 문성모 목사)는 책 ‘이자익 목사, 그 생애를 묻고 답하다’(한들출판사)의 출간 기념 감사예배를 한국교회 대표적 사적인 금산교회 기역자 한옥 예배당 옆에 세워진 본당에서 드렸다. 책은 문성모 목사가 이자익(사진) 목사의 일대기를 문답 형태로 기록한 전기다.


이자익(1879~1958) 목사는 조덕삼 장로의 마부로 일하다 독립한 후 1902년 미국 남장로교 루이스 B 테이트(최의덕) 선교사를 통해 예수를 믿게 된다. 이후 3년 뒤 조덕삼과 함께 세례를 받기 위한 학습을 받았고 이렇게 생긴 모임이 금산교회의 시작이다.

이 목사는 장로교 분열 이전 총회장을 세 차례 지냈으며 호주선교회 요청으로 거창지부 순회 목사로 31개 농촌교회를 돌봤다. 75세 고령임에도 대전신학교(현 대전신학대)와 대전노회를 신설하는 데 이바지했다.

저자인 문 목사는 “한국교회사 주요 인물인 이자익 목사의 업적이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으며 그에 대해 오해와 오류가 많다”고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문성모 목사가 18일 금산교회에서 '이자익 목사, 그 생애를 묻고 답하다' 출간을 기념해 인사말을 하고 있다.

흔히 알려진 ‘그가 종이었던 시절 상전을 제치고 먼저 장로가 됐다’는 일화는 사실과 다르다. 이 목사는 조 장로의 마부였지만 마부는 종이 아니라 일정한 급료(새경)를 받는 계약직 노동자였다. 이 목사가 장로 임직을 받았던 시기는 1908년으로 이미 조 장로의 마부에서 독립해 장사를 하던 때였다. 이 목사의 아버지는 이부일(李富日)이며, 아버지로 알려진 ‘이기진’은 아버지의 자(字)라는 것도 문 목사가 바로잡은 오류 중 하나다.

문 목사는 대전신학대 총장 재임 중이던 2004년 ‘대전신학대학교 50년사’를 편찬하면서 이 목사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후 후손의 증언과 묘비, 일기 등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이 목사에 대한 역사를 다시 정리했다.

책은 ‘이자익 목사는 누구인가’ ‘마부 생활 이후 독립 시기는 언제인가’ 등 오해와 진실을 짚는다. ‘김제에서 거창 순회 목사로 가게 된 과정과 동기는 무엇인가’ ‘이자익 총회장 이후 장로교단은 어떻게 분열했나’ 등 그의 목회와 사역을 보여주는 40개 질문에 답한다.

남청 배재대 명예교수는 “이자익 목사의 모든 생애를 빠짐없이 기록한 책”이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의 일대기는 한국 개신교 역사 전반부 70년과 맞물려 있다”며 “한국 개신교 초기 역사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사료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 목사는 이날 금산교회 설립 120주년을 기념해 교회에 책을 헌정했다. 교회는 문 목사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김종원 목사는 “이자익 목사 전 생애의 발자취를 찾아주시고 이 기록을 헌정해주신 것은 금산교회가 이자익 목사의 사역 정신을 계승하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제=글·사진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