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부터 안경을 썼다. 지금은 안경 없이는 눈앞 10㎝ 바깥은 뿌옇게 보인다. 자고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안경을 찾는 것이다. 가끔 안경을 어디에 벗어뒀는지 몰라 바닥에 코를 대고 한참을 찾아다닐 때도 있다. 안경은 내 눈이다. 내 눈보다 더 내 눈에 가까운 내 몸의 일부다.
몇 달 전 안경다리가 약간 비뚤어진 것 같아 균형을 맞추려다 다리가 아예 부러졌다. 이음새 부분이 부러졌는데 임시로 테이프로 붙여 며칠을 썼다. 테이프로 고정될 리 없으니 불편했다. 당장 안경원에 갈 시간이 없는데 어쩌지, 하다가 서랍을 뒤져 순간접착제를 찾았다. 생각보다 잘 고정이 됐다. 지금은 바쁘니까 여유 있을 때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한 가지 불편한 점은 있었다. 안경다리를 접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집에서는 그냥 썼다.
그러다 미용실에 가게 됐다. 가운을 입자 미용사가 안경을 달라고 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 조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안경을 벗어주며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저리주저리 했다. 미용사가 내 말을 듣더니 말했다. 쓸 수 있는 만큼 오래 쓰면 좋죠. 맞아요! 하하하. 그렇게 웃고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안경원에 못 간 것이 아니라 안경을 바꾸고 싶지 않은 마음이 큰 것 같다고. 예전 같으면 새 안경 살 핑계가 생겼다며 신나서 갔을 텐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새것이 주는 피로감이 있다. 이제는 쓰던 물건을 오래 쓰고 싶다. 쓸 수 있는 최대치로 쓰고 싶다.
부서지고 망가진 것을 금세 새것으로 바꾸며 살곤 했는데, 이제 알게 됐다. 사용에 크게 무리가 없다면 고쳐 쓰고, 보완해 쓰면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 느끼긴 어려운데, 이번에 그 가능성을 경험하게 된 것 같다. 꼭 물건만이 아니라, 누구나 어느 정도 부서지고 망가진 부분이 있다. 그것을 버리거나 외면하는 방식이 아니라, 품으며 함께 살아가는 것도 삶의 한 방식이다. 멀쩡하고 온전한 것만이 삶의 형태가 아니니까.
안미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