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오슬로 시청의 벽화

입력 2025-10-20 00:37

노르웨이 오슬로시청 내부는 붉은 벽돌의 소박한 외관과 다른 세계를 펼쳐낸다. 중앙홀의 흰 대리석 바닥과 천장 사이 21m 높이의 벽면에 그려진 벽화를 보고 있으면, 마치 거대한 미술품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이 든다. 네 방향의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는 노르웨이의 과거와 현재를 보여주는 자화상인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선언문과 같다.

중앙홀에 입장하자마자 오른쪽에 보이는 서쪽 벽화는 오슬로시 문장(紋章)에도 등장하는 11세기 성인 할바르 베요른손의 이야기를 다룬다. 할바르는 도둑으로 의심받고 쫓기던 여성의 결백을 믿고 자신의 배에 태워 탈출을 돕다 추격자들의 화살을 맞고 숨졌다. 이후 추격자들의 범행은 들통났고, 마을 주민들은 목숨까지 걸고 타인을 도운 할바르를 순교자로 여기며 추모했다. 서쪽 벽화는 희생정신과 연대 의지가 노르웨이 공동체의 근간임을 말해준다.

남쪽 벽에는 대형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오슬로를 상징하는 조각상인 ‘신나타겐’(화난 아이)을 중심에 두고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는 인간상이 펼쳐져 있다. 이는 노동과 행정, 축제를 의미한다고 한다. 국민은 노동으로 국부를 쌓고 정부는 행정으로 국민의 복지를 지원하며, 구성원 모두 여가를 즐기는 일과 생활의 균형, 즉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노르웨이의 철학이 담겼다.

맞은편인 북쪽 벽화의 주인공은 어업과 임업, 광업, 공업 등 노르웨이 핵심 산업 노동자들이다. 생산의 3요소(노동·자본·토지) 가운데 노동을 가장 중시하는 노르웨이의 경제 정책 방향이 이 벽화에 드러난다. 벽화는 1950년대 초반에 완성됐는데, 노르웨이는 1969년 북해 유전을 발견하고도 원유 시추 수입의 상당액을 국부펀드로 쌓으며 제조업과 어업, 광업 등 주력 산업을 키웠다. 노르웨이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국가다.

중앙홀에서 가장 많은 입장객의 발길을 사로잡고, 그 함의를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는 벽화는 동쪽 벽에 있다. 폭격기와 비밀경찰, 문화재 파괴, 수용소와 저항군, 그 힘겨운 싸움 끝에 자유를 쟁취한 역사를 그려낸 동쪽 벽화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웨이가 나치 독일에 점령됐다 해방된 기간의 이야기다. 이 벽화는 자유가 피로 얻은 대가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오슬로시청 중앙홀에선 매년 알프레드 노벨의 사망일인 12월 10일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린다. 스웨덴이 나머지 5개 부문 노벨상을 수여하고, 평화상 부문만 노르웨이가 시상하게 된 배경은 노벨의 유지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연합왕국 시절인 1895년 사망을 앞두고 작성한 유언장에 ‘노르웨이 의회가 평화상 수상자를 결정하는 위원 5명을 지명하라’는 뜻을 남겼다. 당시의 유언이 지금까지 이행되고 있다.

노벨은 또 유언장에 노벨평화상 수상 자격을 ‘국가 간 우애, 상비군 폐지 또는 감축, 평화회의 개최 및 증진을 위해 가장 많은, 혹은 가장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적시했다. 이후 노벨평화상은 헨리 키신저(1973년)나 버락 오바마(2009년)처럼 수상 자격 논쟁을 불러올 때도 있었지만, 2010년 투옥된 중국 인권운동가 류샤오보를 선정한 뒤 빈 좌석에 메달만 놓고 3분간 기립박수를 치는 인상적 순간도 만들었다. 올해 수상자인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마리아 코리나 마차도의 시상식 참석도 불투명하다.

매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이 열릴 때마다 오슬로시청 중앙홀 벽화가 던져주는 질문을 수상자에게 건네볼 수도 있겠다. ‘이타심과 연대 의지가 있는가. 폭력에 굴복하지 않았는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는가.’ 내년 수상자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을까.

김철오 국제부 차장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