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깨운 ‘기적의 5분’, 50년 헌신의 길을 열다

입력 2025-10-17 03:07
1950년 북한군 군의관에서 국군 의무관으로 ‘5분 만에’ 신분이 바뀌는 기적을 체험한 청년이 있었다. 장천(杖泉) 김선도(1930~2022) 목사는 그날의 서원을 지키며 90년을 신앙에 헌신했다. 의사의 꿈을 접고 목회자가 된 그는 웨슬리 정신을 계승해 광림교회를 세계적 교회로 성장시켰고, 국제구호개발기구 월드비전에서 이사장으로 섬기며 사회적 사랑을 실천했다. 다음 달 25일 소천 3주기를 맞아 국민일보는 평안북도 출신 소년에서 세계적 목회자로 성장한 그의 발자취를 5회에 걸쳐 조명한다.

장천 김선도 목사가 생전 지팡이를 쥐고 기도하고 있다. 국민일보DB

북한군과 반대로 국군이 있는 곳을 향해 저벅저벅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결국 그는 국군과 맞닥뜨렸다. 생사의 기로에 선 그에게 국군 장교가 말했다. “당신이 필요하오. 보아하니 북한 군의관이었던 것 같은데, 이쪽에 다친 군인이 많으니 도와주시오.” 포로가 될 줄 알았지만 예상치 못한 반응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그는 병사들을 치료하기 시작했다. 6·25전쟁 당시 한 의학도의 삶을 ‘운명’에서 ‘소명’으로 단숨에 뒤바꾼 가장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신앙의 뿌리, 평북 선천

김 목사는 1930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선천은 기독교 인구 비율이 높았고, 3·1운동 당시 가장 먼저 희생자를 낸 곳이었다. 1907년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평양과 지척인 이곳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겪으며 의사의 길을 꿈꿨다. 하지만 공산주의 체제에서 생명이라는 가치가 사상과 융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북한군 군의관 장교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의 허망함을 목격했고 그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은 점점 커졌다.

6·25전쟁 당시 UN종군 경찰병원 의무관 시절 김(오른쪽) 목사가 캐나다 군의관과 함께한 장면. 국민일보DB

50년 10월 어느 날, 그의 인생을 바꾼 결정적 순간이 찾아왔다. 6·25전쟁 중 북한군 부대가 패전해 후퇴하는 과정에서 탈출의 기회가 온 것이다. 마침내 연락병에게 미리 사복을 준비시키고 탈출을 감행했다. 국군에게 잡히는 순간 기적같이 5분 만에 북한 군의관에서 국군 의무관으로 신분이 바뀌는 은총을 경험했다.

그는 자서전 ‘5분의 기적’에서 “숨 막히는 환경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북한군을 탈출하려 했고 죽음 앞에서 살려주시면 일평생 하나님께 헌신하겠다고 서원했다”고 고백했다. 이 체험은 그의 일생을 긍정하는 체험이 됐고 절대 섭리에 대한 믿음을 심어줬다. 그는 육신의 의사 대신 영혼의 의사, 목회자의 길을 걷기로 결단했다.

의학에서 신학으로, 구도의 여정

전쟁 직후 그는 무너진 조국 땅을 돌아다니며 폐허 속의 절망을 보았지만 동시에 생의 의지를 목격했다. UN종군 경찰병원 의무관(1952~53)을 거쳐 55년 감리교신학대에 입학해 구도의 날들을 보냈다.

장로교 배경이었던 그에게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1703~91)의 신학 사상은 큰 발견이었다. 하나님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자유 의지와 적극성을 강조하는 웨슬리의 사상은 목회 철학의 근간이 됐다. 특히 ‘세상은 나의 교구’라는 웨슬리의 선언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 정신은 세계를 품는 목회자가 돼야겠다는 비전으로 이어졌다.

1958년 김 목사가 감리교신학대 졸업식에서 연세대 총장을 지낸 박대선(오른쪽) 박사와 학사모를 쓴 모습. 국민일보DB

그는 전농감리교회 시절(1957~62)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돌보는 ‘전인적 치유’ 목회를 지향했다. 이는 영육뿐 아니라 관계의 치유까지 아우르는 목회였다. 공군기술교육단 군목 시절(1962~67)에도 고난을 무릅쓰고 포기하지 않는 노력으로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사용하는 지혜를 배웠다.

유학의 꿈, 불가능을 가능으로

세계를 향한 비전을 품고 60년대 초반 유학을 꿈꿨지만, 당시 일반인에게 여권 발급은 거의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단호한 태도와 기도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던 여권 발급 문제를 극복하고 유학의 꿈을 이뤘다.

미국 웨슬리신학대학원 유학은 그의 인생에서 또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신실한 기도와 철저한 준비, 그리고 마지막에 자신의 노력까지 내려놓는 자세가 영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이러한 설교 철학은 71년 광림교회 개척 이후 폭발적 성장의 핵심 동력이 됐다.

김 목사는 자서전에서 “인생을 1시간으로 비유할 때 남은 시간은 5분 정도에 불과할 것”이라며 “남은 5분을 생사의 갈림길에서 하나님 은혜로 충만했던 그때 그 5분의 감동으로 살아가고 싶다”고 고백했다.

그가 남긴 것은 거대한 교회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다. 그는 고난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신앙, 운명을 사명으로 바꾸는 적극적 믿음, 한 영혼을 귀히 여기는 목회, 그리고 세계를 품는 선교 비전이다.

그의 호 장천(杖泉)은 지팡이와 샘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17장 1~7절에서 모세가 갈급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지팡이로 반석을 쳐 샘이 솟아나게 한 이야기에서 따온 것이다. 그는 50여년 목회 여정 전체를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실현하고자 한 과정이었다고 고백했다. 긴 강물처럼 흘러 세상을 적시겠다는 그의 신앙 유산은 이제 장천기념사업회와 영적 제자들을 통해 다음세대로 이어지고 있다.

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