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세기의 이혼… 비자금 대물림 막아선 대법원 판결

입력 2025-10-17 01:30 수정 2025-10-17 01:30
최태원(왼쪽 사진)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뉴시스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에서 법원 판단이 급변을 거듭한 배경에는 ‘노태우 비자금’ 300억원이 있었다. 1심은 SK그룹 성장에 대한 노태우 전 대통령의 ‘기여’를 인정하지 않은 채 노 관장의 재산 분할 몫을 665억원으로 산정했지만, 2심에서 노 관장 모친 김옥숙 여사가 보관해온 ‘선경 300억’ 메모 등 비자금을 SK에 제공한 자료가 제출되자 재판부가 이를 인정해 1조3000억원 재산 분할 판결을 내렸다. 두 사람의 혼인 전후에 노 전 대통령 돈이 SK에 제공됐으니 노 관장의 재산 형성 기여로 본 것인데, 대법원은 16일 판결에서 ‘그 돈이 무슨 돈이냐’에 주목했다.

대법원은 “SK에 노 전 대통령 돈이 지원됐더라도 그 출처는 대통령 재직 때 수령한 뇌물로 보인다”며 “이는 사회 질서에 반하고 반사회성·반윤리성·반도덕성이 현저해 법의 보호 영역 밖에 있다”고 했다. 법을 어겨 획득한 불법 자금이 후손의 경제적 이익으로 귀결되도록 법률을 적용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노 관장 측은 “비자금을 돌려 달라는 게 아니라 재산 형성 기여를 인정해 달라는 것”이라 했지만, 대법원은 “그 경우에도 불법성이 절연될 수 없다”면서 불법 자금의 대물림을 차단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히 하며 파기환송 결정을 내렸다.

대법원 판결은 우리 상식에 부합한다. 형법은 범죄로 얻은 수익을 추징토록 하고 있고, 민법에도 ‘불법의 원인으로 재산을 급여한 때는 그 이익의 반환을 청구하지 못한다(746조)’는 규정이 있다. 불법 자금에 대한 권리를 이렇게 제한하지 않았다면, 일단 법을 어겨 돈을 챙긴 뒤 권리를 주장하는 일이 만연했을 것이다. 노 관장 측의 소송 논리는 이런 불법 자금에 대한 당사자의 권리를 넘어 ‘상속권’을 인정해 달라는 셈이었다. 자금의 성격을 분리한 채 돈의 존재만 따져 판단했다면, 우리 사회가 법과 규범을 통해 애써 지켜가는 중요한 가치가 흔들릴 수 있었다.

대법원은 원심의 재산 분할을 파기했지만 위자료는 그대로 확정했다. 1심에서 1억원이던 게 2심에서 20억원으로 국내 이혼소송 사상 최고액이 책정됐는데, 그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결혼 파탄의 원인 제공자에게 경제력에 상응하는 책임을 지우는 판례를 수립했다. 나아가 민사소송의 기계적인 위자료 산정 관행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번 소송은 ‘세기의 이혼’이라 불렸다. 관심이 집중됐으니 사회적 파장 역시 큰 사건에서 대법원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