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잘 풀려 기쁜 것인지, 안 풀려 화가 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얼굴 표정에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돌부처’다.
지난 12일 경기도 용인 88CC에서 끝난 KLPGA투어 K-FOOD 놀부·화미 마스터즈에서 올 시즌 세 번째로 3승에 성공한 홍정민(23·CJ)이다. 그는 이 대회 원년 챔프 등극에 앞서 지난 5월 시즌 첫 메이저대회 크리스에프앤씨 제47회 KLPGA 챔피언십과 8월 메디힐·한국일보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통산 4승 중 ‘메이저퀸’에 오른 건 KLPGA 챔피언십이 유일하다. 메디힐·한국일보 챔피언십에서는 KLPGA투어 72홀 최소타 신기록(29언더파 259타)을 세웠다. 올 시즌 세 차례 우승 중 두 번이 한 번도 선두를 내주지 않은 와이어투와이어였다는 점도 그의 기량이 한껏 올라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번 우승 상금 2억1600만원을 보태 8주 만에 다시 시즌 상금 순위 1위(12억9401만6667원) 자리를 되찾았다. 대상 포인트와 평균타수 부문에서도 나란히 2위를 달리고 있다. 내용과 결과 모두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국가대표 출신인 홍정민은 2021년에 KLPGA투어에 데뷔, 이듬해 두산 매치플레이 챔피언십에서 생애 첫 우승의 기쁨을 만끽했다. 그해 상금 순위 18위, 2년차인 2023년 10위를 기록하며 가능성을 인정 받았다.
국내 무대에 만족할 그가 아니었다. 2023년 시즌 종료 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퀄리파잉 시리즈에 도전했지만 조건부 시드를 받는데 그쳤다. 이후 유럽여자프로골프투어(LET)로 눈길을 돌려 모로코까지 날아가 퀄리파잉(Q)스쿨에 도전해 풀시드를 획득했다.
지난해 LET투어를 주무대로 활동한 그는 올 시즌 아예 국내 무대로 돌아왔다. LET투어에서의 시간이 전혀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는 “LET투어 경험이 지금 경기력의 밑거름이 됐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었음에도 그는 얼굴 표정에 큰 변화가 없다. 다른 20대 초반 선수와 달리 좀처럼 감정선을 드러내지 않는 포커 페이스다. 홍정민은 “사실 긴장을 많이 하는 편인데 안면근육 때문에 그렇게 안보일 뿐”이라며 웃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엄청 쫀다”고 말했다.
그의 포커페이스를 이번 대회에서도 볼 수 있었다. 투어 데뷔 이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며 딸을 돌봤던 어머니가 병환으로 입원해 이번 대회 현장을 찾지 못했다. 병원에서 딸의 우승 소식을 들었다. 통산 4승 중 홍정민이 어머니 없이 우승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홍정민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입원하셨다. 의도치 않게 이번 대회는 혼자였다”며 “어머니가 정확한 병명은 밝히지 말아 달라고 당부하셨다”고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정이 흔들릴 법도 했지만 그런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당분간 어머니 없이 혼자 투어 생활을 해야 한다. 당연히 어머니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홍정민은 “간식 같은 것도 직접 챙겨야하고, 무엇보다 경기 중간 정신적으로 힘들 때 도움을 못 받는 부분이 가장 아쉽다”며 “이번 대회 14번 홀에서 보기를 하고 난 뒤 엄마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졌다. 빨리 쾌차하셔서 제 곁으로 돌아오시면 좋겠다”는 바람을 밝혔다.
홍정민 역시 투어 데뷔 이후 자잘한 병마로 힘든 시기를 보냈다. 2023년 초에는 자율 신경계 기능 장애와 공황 장애에 시달렸다. 치료와 투어를 병행하면서 치유했지만 지난해부터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알레르기성 피부병에 시달렸다. 지난 9월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KB금융 스타챔피언십 이후부터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지금은 호전돼 정상 컨디션을 회복한 상태다.
홍정민은 “알레르기로 열감과 어지럼증이 있어 힘들었지만 지금은 괜찮다”며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 좋은 상태다. 집중만 잘 한다면 남은 시즌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상금 1위로 마무리해보겠다”고 강한 자신감을 내보였다.
아픈만큼 성숙해진다고, 홍정민은 올 시즌 작년보다 부쩍 성장한 것 같다. 아주 편안하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른바 ‘툭툭 스윙’은 더욱 유연해지면서 완성도가 높아졌고, 코스 매니지먼트도 한층 치밀해졌다.
그는 올 초반부터 줄곧 상금왕이 시즌 목표라고 했다. 올해 일정이 4개 대회 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일단은 유리한 고지를 점한 상태다.
홍정민은 “마지막까지 경쟁해야 한다면 자신 있다. 개인적으로 샷의 기복이 별로 없는 편이기 때문”이라며 “특히 2주 전 대회부터 성적보다는 샷감을 끌어 올리는데 주력했는데 생각대로 잘 맞아 떨어져 자신감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그는 “꼭 다승왕까지는 아니더라도 대회를 나갈 때마다 우승을 목표로 하겠다. 컨디션이 좋아 한 차례는 더 우승할 것 같다”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해외 진출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라며 “당장 해외 무대 진출보다는 2028년 LA올림픽 출전을 염두에 두고 준비하고 있다”는 계획을 밝혔다.
정대균 골프선임기자 golf56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