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을 통해 세계가 연결됐다지만 실제 세상에선 길 가다 마주치고 대화 나눌 일은 더욱 줄어든 비연결의 시대다. 더욱이 팍팍한 도심, 빽빽한 아파트촌에서 살가운 만남을 기대하긴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서도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이나 어둠 속 별빛 같은 반짝임을 선사하는 가게들이 있다. 일상 속 작은 대화와 웃음의 여유로 아직 마을이 존재함을 느끼게 해주는 이곳들엔 예수님 사랑을 닮은 실천의 모습이 있었다.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쉼 건네는 카페
“요즘 왜 이렇게 힘들어 보여요. 괜찮나요.” 아침 등굣길 카페에 들른 고등학생 손님의 표정을 살피던 사장님이 음료를 만들던 손을 잠시 멈춘다. 매일 아침 오가며 보이던 밝은 모습과 달리 그날 학생 얼굴은 유난히 고단해 보였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장님과 눈을 마주친 학생은 “중간고사라 그래요”라며 웃음으로 답한다.
카페 인스타그램에 올려진 숏츠 영상은 생각지도 않게 30만 넘는 조회수를 올렸다. 그저 안부를 물었을 뿐인데 많은 학생과 동네 엄마들이 위로를 받고 고맙다며 댓글을 달고 카페를 찾아왔다.
경기도 용인 한 아파트단지 입구에 있는 9.8㎡ 남짓의 작은 카페, ‘쿠름이의 꿈’ 이야기다. 매일 아침 7시, 문이 열리면 빨간 모자에 앞치마를 두르고 어깨에 미키마우스 인형을 올린 사장님 정지혜(36)씨가 마치 만화 속에서 막 걸어나온 캐릭터처럼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쿠름이 카페’는 ‘쿠키’와 ‘구름’을 합친 말로, 잠시 머물다 가는 손님들이 이곳에서 따뜻한 휴식을 얻고 자유롭게 떠다니는 구름처럼 새로운 모험과 꿈을 향해 나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2021년 7월 문을 열었다.
목회자 사모이기도 한 정씨는 아세아연합신학대학원에서 상담을 전공했다. 그는 “목회자 남편과 결혼해 사모로 두 아들을 키우며 살다 보니 내 꿈과 동심이 희미해졌다.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고 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작은 용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카페를 열었다”고 말했다.
그는 손님에게 음료 한잔을 내어주는 일보다 대화를 통해 손님의 하루를 묻고 마음을 나누는 순간을 더 소중히 여긴다. 일곱 살 유치원생부터 92세 어르신까지 그의 소통엔 세대 구분이 없다. 이렇듯 손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공감하는 덴 그가 삶 속에서 오래 겪어 온 아픔과도 무관치 않다.
“어릴 때 잦은 병으로 병원을 자주 오갔는데, 내 아픔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힘들어도 늘 웃었어요. 사모로서도 밝은 얼굴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버텼죠. 지난해 번아웃이 왔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며 진짜 내 모습을 찾기 시작했어요.”
정씨는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니 ‘가장 나다운 나’가 보였다고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부족하고 실수해도 괜찮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순간이었다.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할 수 있다면’이라는 마음으로 손님들과의 대화를 영상에 담기 시작했다.
수술 중인 엄마를 위해 쿠키를 사러 왔는데 돈이 부족했던 아이에게 700원을 깎아주고 초콜릿을 덤으로 준 영상은 70만 조회수를 기록했다. 정씨는 이날 “사랑은 거창하지 않아도 된다. 가족과 친구의 진심, 작은 행동이 모여 큰 사랑이 된다”는 깨달음을 함께 전했다.
이렇게 동네 사랑방이 된 ‘쿠름이’ 카페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손님들이 매일같이 오가며 마음을 나눈다. “매일 그렇게 이야기 나누려면 힘들지 않냐”는 질문에 그는 웃으며 답했다. “손님들의 사연을 품고 기도하며 그들의 삶을 축복할 수 있다는 게 제겐 오히려 힘이 됩니다. 모두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한 편의 시로 이웃 위로하는 과일가게
‘우리 살아가는 일 속에 파도치는 날 바람부는 날이 어디 한두 번이랴. 그런 날은 조용히 닻을 내리고 오늘 일을 잠시라도 낮은 곳에 묻어두어야 한다.’
서울 송파구의 과일가게 ‘스위트리’ 앞엔 이젤 보드가 하나 세워져 있다. 과일 가격이나 행사 안내가 아니다. 보드판엔 김종해 시인의 ‘그대 앞에 봄이 있다’가 적혀 있다. 매번 같은 시는 아니다. 동네 사람들은 과일을 사지 않아도 잠시 멈춰 서서 시를 읽고 가거나 사진을 찍어 남기곤 한다.
가게 주인은 특이하게도 목사다. 2019년부터 이곳을 운영해 온 박요섭(45) 목사는 “그저 과일만 파는 곳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사람들에게 작은 행복을 전하고 싶었다”며 “직접 그린 그림과 좋은 음악 그리고 짧은 시 한 줄로 잠시라도 이웃을 미소짓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쁜 일상을 살면서 이웃들이 잠시 멈춰 좋은 글로 마음의 여유를 찾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시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는 “시를 고르고 써 내려가다 보면 과일가게가 조금은 특별한 공간이 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계절과 날씨에 어울리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볼 수 있는 내용이 담겼는지가 선정 기준이다.
“매일 같은 시간에 시를 읽으러 오는 손님도 있고 ‘시를 읽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며 책을 선물한 교수님도 있었어요. 오가는 손님들이 시를 통해 마음을 나눌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이젠 시를 써두지 않으면 ‘오늘은 시 없나요’라고 물어보는 분들도 있어요.”
‘일하는 목회자’로 살아가는 박 목사는 교회 밖에서 고객을 만나는 매 순간이 목회의 연장이라고 했다. 그는 “목회자와 성도가 아니라 이웃집 아저씨, 과일가게 사장으로 찾아오는 분들이 고민을 털어놓거나 기도를 부탁할 때 가까이에서 위로할 수 있다는 게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박 목사는 앞으로 직접 그린 그림도 어울리는 시와 함께 매장에 전시할 계획이다. 그는 “완벽하진 않지만 내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동네 이웃들에게 흘러가길 바라며 그 삶이 열매 맺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24시간 불 밝히는 동네 편의점
울산 남구에 있는 CU수암신선점은 이 동네의 작은 등불이자 쉼터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의 특성에 작은 관심이 더해지며 이웃의 삶을 살피는 역할을 맡고 있어서다.
변명숙(54) 점주는 지난 14일에도 한 노인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일주일에 다섯 번이나 들른 ‘쉼 손님’이었다. 그렇게 그냥 쉬었다만 가도 되는데, 노인은 미안했던지 1150원짜리 라면 한 개를 사려다 두 개를 집어 들고 계산대에 섰다.
변씨는 “제 것까지 안 사셔도 된다”며 웃었지만 그는 굳이 굳이 계산을 하고 함께 먹자고 했다. 그 안엔 ‘외로우니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조용한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변씨는 설명했다.
“편의점을 운영하다 보니 동네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돼요. 그 속에서 어려운 사정이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이 자연스레 보이게 되더라고요.”
도움을 주고 싶어도 방법을 몰랐던 그는 지난해 11월 울산 남구의 ‘편의점 위기이웃 발굴 사업’으로 이웃에게 손을 내밀 길을 찾았다. 이 사업은 점주가 도움이 필요한 손님을 발견하면 계산대의 ‘신고 버튼’을 눌러 구청에 알림으로써 복지 사각지대를 잇는 것이다. 신고를 받은 공무원은 현장을 방문해 상담하고 필요 시 매달 2만원 상당의 바우처를 해당자에게 지급한다. 이웃의 삶을 들여다보기 힘든 시대에 골목마다, 누구나 찾을 수 있는 편의점이 창구가 되어주는 셈이다.
이 사업을 담당하는 CU 유철현 팀장은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편의점을 복지 사각지대 발굴 거점으로 보는 지방자치단체의 협약 제안이 이어졌고, ‘편의점 위기이웃 발굴 사업’은 현재 18개 점포가 참여 중”이라며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처럼 이 사업이 단절된 이웃을 잇는 마중물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물론 한 번에 해결되는 건 아니다. 편의점까지 나올 수 있는 사람들과 달리 집 안에 고립된 어르신 등은 여전히 사각에 있다. 변씨는 “편의점이 있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많아 안타깝다”며 “앞으로도 동네를 세심히 살피며 어려운 이웃을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