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노동의 가치가 희미해지는 시대

입력 2025-10-18 00:39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도 노동의 가치는 낮아지고 있다. 전문성과 숙련도와는 상관없이 대부분 인류가 직면한 상황이다. 인플레이션과 인공지능(AI)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 거대한 흐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인류가 원하는 방향으로 통제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KB부동산이 집계한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15일 기준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격은 14억3621만원이다. 18개월 연속 상승했다. 노동을 통해 얻은 소득도 집값 상승률과 동행한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우리는 체감으로 알고 있다. 통계청이 올해 2월 발표한 ‘2023년 임금근로일자리 소득(보수) 결과’에 따르면 임금근로자의 월평균 소득은 363만원이다. ‘평균의 함정’으로 그나마 높게 나온 것이다. 중간 위치에 있는 근로자의 소득을 의미하는 중위소득은 278만원이다.

중위소득 기준 한 푼도 쓰지 않고 월 소득을 43년 모으면 평균 가격의 서울 아파트를 살 수 있게 된다. 다만 그때가 되면 집값은 더 올라 저만치 멀리에 있을 것이다. 온전한 노동 소득만으로는 집을 살 수 없다.

이 때문에 대부분 국민이 대출에, 증여에, 양가 사돈에, 사촌 팔촌의 도움(받을 수 있다면) 등 모든 가용 수단을 활용해 집을 사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는 것이다. 정부의 부동산 대책만으로 잠재울 수 있는 수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부동산 시장을 왜곡하는 불공정 거래, 투기 세력들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저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고 있었을 뿐인데 급격한 인플레이션에 ‘벼락 거지’가 되기 싫어 매수에 나선 이들이 대부분이다.

M2(광의통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지금의 체제에서는 인플레이션은 막을 수 없다. 금본위제 폐지 이후 각국 중앙은행이 마음껏 화폐를 찍어낼 수 있게 되면서 인플레이션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됐다.

미국은 닷컴버블과 2008년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등 위기가 올 때마다 막대한 규모의 돈을 찍어내는 방식으로 시장 붕괴를 막았다. 앞으로 다가올 금융위기에 미국은 큰 고민 없이 달러를 찍어낼 것이다.

금리를 올리면 단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억제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잠깐이다. 속도 조절만 가능할 뿐이다. 기축통화인 달러가 풀릴수록 한강벨트 아파트값이 치솟는 글로벌 시대에 인간의 노동 가치는 점점 희미해진다. 그리고 그 속도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일가가 주도하는 가상자산(암호화폐)도 인플레이션을 자극할 위험 요소다. 가상자산 발전 방향은 짐작하기 어렵지만 스테이블 코인의 제도권 진입은 중앙은행 통제 밖의 유동성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신성한 노동의 가치를 돈으로만 재단하느냐고 꾸짖을 수도 있겠다. 생계를 위한 노동은 돈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맞는 말이지만 인간을 완벽하게 대체하는 AI가 등장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많은 분야에서 인간을 대체하는 상황인데 체감을 못 할 뿐이다.

인플레이션처럼 AI의 발전도 막을 수 없다. 2023년 3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와 스티브 워즈니악 등 AI 업계 인사 1000여명이 공개서한을 통해 “챗GPT-4 수준 이상의 고도 AI 개발을 최소 6개월간 중단하자”는 내용의 목소리를 냈다. 통제 불확실성과 일자리 대체, 사회적 혼란 등으로 인류 문명이 사라질 위험성을 제기했다. 하지만 이미 출발해버린 AI 기술개발 열차를 세우지는 못했다. 기술적 진보를 경험한 인간은 절대 과거로 돌아가서 살 수 없다.

구글의 알파고가 세계 최강 바둑기사 이세돌 9단을 꺾은 때가 2016년이다. 내년이면 10년 차가 된다. 가장 창의적이고 예술로도 여겨진 바둑을 AI에 내줬다. 다음은 어떤 분야가 되더라도 놀랍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노동이 없으면 인류의 존재가 위협받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노동의 새로운 형태와 가치를 찾아내는 순간이 올 것 같다.

다만 그 과정이 매우 지루하고 지난할 것이고 혼란도 불가피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현대인이 고민하지 않았던 삶의 이유와 인간다움을 발견해 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지금처럼 돈만 좇는 사회만 아니었으면 좋겠다.


이광수 경제부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