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탁이 어렵다. 아주 어렵다. 부탁할 때마다 손에 땀이 고인다. 얼굴이 굳고 말이 꼬인다. 비영리단체를 이끄는 사람으로선 치명적 약점이다. 그런데도 33년을 버텼다. 이것도 신비다.
어느 날 면전에서 거절을 당했다. 서늘한 말 한마디. 돌아서는 길에 분노와 수치심에 떨었다. 돌아와 애먼 아내에게 화를 폭발했다. 그 밤, 시편 기자의 기도가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가난하고 빈곤합니다. 내 마음이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나는 석양에 기우는 그림자처럼 사라져가고, 놀란 메뚜기 떼처럼 날려 갑니다. 금식으로, 나의 두 무릎은 약해지고, 내 몸에서는 기름기가 다 빠져서 수척해졌습니다. 나는 사람들의 조소거리가 되고, 그들은 나를 볼 때마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멸시합니다. 주, 나의 하나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으신 사랑을 따라, 나를 구원하여 주십시오.”(시 109:22~26, 새번역)
그때 알았다. 도와달라는 말은 살려달라는 기도와 맞닿아 있음을. 성경을 더듬다 이번에는 다윗의 처참한 모습과 맞닥뜨렸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특별했다. 기름 부어 왕으로 세워준 예언자. 영적 보호자.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났다. 다윗은 광야로 쫓겨난다. 망명객이 된다. 함께한 사람만 600명이다. 그들을 먹여 살려야 했다. 약탈이 잦은 방목지에서 목자들을 지켜준다. 요즈음의 ‘경호 서비스’였다. 명절이 다가온다. 목축업을 하고 있던 유다 지파의 나발에게 사람을 보낸다. 양 3000, 염소 1000마리를 거느린 거부였다. “아들이나 다름이 없는 이 다윗을 생각하셔서, 먹거리를 좀 들려 보내 주십시오.”(삼상 25:8, 새번역)
나는 그 한 줄에서 멈췄다. 미래의 권력이 일개 목축업자에게 이렇게 낮아지다니. 오롯이 식솔을 위한 일이었다. 나발의 대꾸는 거칠었다.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먹거리를) 주겠느냐.” 그의 말은 끝내 다윗의 분노를 격발시킨다.
그날 나는 방바닥을 구르며 울었다. 나 같은 게 뭐라고. 그때 알았다. 쏟아낸 눈물이 내게 가르쳐 주는 것이 있었다. ‘거절도 쌓이면 실력이 된다. 거절이 자산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회전근개 파열이 왔다. 오른팔이 멈추자 삶이 멈췄다. 그제야 입이 열렸다. “저 좀 도와주실래요.” 부탁은 생활이 아닌 생존이 되었다.
정일근 시인의 ‘오른손잡이의 슬픔’이 떠오른다. 오른손이 아파서야 왼손의 존재를 안다. 강한 쪽에 기대던 습관이 멈춰야 비로소 부탁을 배운다. 부탁은 약함의 고백이 아니다. 관계의 방식이다. 서로의 결을 빌려 완전에는 못 미치지만, 온전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십자가상의 일곱 말씀은 부탁으로 시작해 부탁으로 끝난다. 주님은 강도가 자신을 기억해 달라는 부탁에 지체하지 않고 “오늘 네가…”로 응답하신다. 주님은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시고 끝내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신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부탁과 응답, 맡김과 수락이 십자가의 문법이다.
우리네 일생도 부탁으로 시작해 부탁으로 마무리된다. 이래서 부탁은 삶의 기술이다. 부탁이 내 삶의 질을 결정해서다. 부탁을 잘하는 사람은 기도도 잘한다. 기도 역시 부탁이어서다.
어느 성인이 말했다. “하나님이 한 영혼에 베푸실 수 있는 최대의 영예는, 그에게 위대한 것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위대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한다. 큰 부탁은 타인을 작아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큰 자부심과 참여의 영예를 안겨 준다. 비전을 현실로 바꾸는 일에서 부탁하기는 리더십의 핵심이다. 내가 내게 이른다. 크게, 그러나 명확히, 그리고 존중으로 부탁하라.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수업’에서 김지수 기자는 이렇게 적었다. “부탁도 그래. 나를 위해 하는 거지만 그게 남에게도 유익이거든. 나는 남에게 부탁할 수도, 부탁받을 수도 있어. 그걸 알기에 도와주는 거야.”
연말이 눈앞이다. 부탁할 일도 많고 부탁을 들어줄 일도 많다. 부탁으로 한 해가 지고 부탁으로 새해가 다가온다. 다가온 부탁의 계절, 스스로 다짐해 본다. 겁먹지 마라. 쫄지도 마라. 그렇게 우리는 사람에게 배우고, 하나님께 구한다. “손은 둘이 하나다/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두 손을 모아야 기도가 되듯이.”(정일근)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산다.
동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