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박찬욱 감독이었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어쩔 수가 없다’는 특유한 그의 그로테스크한 감성과 은닉적 메타포, 반전 메시지를 보여주며 몰입도를 높였다. 물론 몇몇 잔혹한 살인과 파괴, 기괴한 장면에 거부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 소외와 파괴의 메타포를 위해 의도적으로 차용했다면 예술적으로 이해해야 하겠지만.
영화는 주인공 만수가 25년 동안 성실하게 다니던 제지회사 ‘태양’에서 실직을 당하며 시작된다. 만수는 자신의 모든 인생을 바쳐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도시 외곽에 정원이 있는 2층집을 사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실직당하고 거리로 쫓겨난다. 아내를 비롯해 가족들은 당황하고 하나 둘씩 포기해야 할 것이 생겨난다. 위기를 극복할 유일한 길은 만수가 재취업에 성공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만수는 재취업을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범모, 시조, 선출이라는 제지회사의 유능한 전문가들이 희생된다. 그들이 사라져야 만수의 재취업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남을 죽여야만 자신이 살 수 있는 약육강식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수는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반복해서 중얼거린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어쩔 수가 없다….” 박 감독은 영화를 통해 물질화, 기계화된 세상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인간 소외와 파괴, 상처와 분노, 절망과 죽음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만수는 아들의 눈초리를 의식한 듯, 시조의 시신을 돼지 살처분하듯 묶어 땅에 파묻고 사과나무를 심는다. 우여곡절 끝에 형사들의 의심마저 벗어나고, 만수는 자유를 누리며 재취업에도 성공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폐증을 앓는 만수의 딸 리원이 미소를 지으며 첼로를 연주한다. 아름다운 첼로 선율을 배경으로 숲의 나무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포클레인의 모습들이 오버랩되며 영화는 끝난다.
나는 이 마지막 리원의 첼로 연주에서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결국 이 세상은 승자독식과 권력 독점에 기반한 분노와 증오, 상처와 파괴의 사상과 질서로는 희망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시신을 은폐하기 위해 심은 사과나무에서 악취가 나고 벌레가 들끓으며 죽어가는 것처럼 말이다. 도스토옙스키가 말한 대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듯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외치고 싶다. “어쩔 수가 있다! 어쩔 수가 있다! 어쩔 수가 있다!” 어쩌면 감독은 영화에서 반문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과연 누가 어쩔 수가 없는 이 사회를 어쩔 수가 있게 할 수 있을까라고 말이다. 그럼에도 감독은 어쩔 수가 없다고 시종일관 주장하고 있다. 사실이다. 어느 누구도 어쩔 수가 있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어쩔 수가 있게 하는 존재가 있다. 그것이 바로 한국교회다.
서로 죽고 죽이는 분노와 증오의 거름더미 위에서 어떻게 희망의 사과나무를 자라게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사랑과 용서, 화해와 포용의 복음 안에서는 길을 찾을 수가 있다. 교회가 어떤 곳인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막힌 담을 헐고 서로 화평하고 하나가 되게 하는 곳이 아닌가.(엡2:14)
한국교회는 어쩔 수가 없는 세상 속에서 상처받고 절망하는 사람들을 향해 “어쩔 수가 있다!”고 외쳐야 한다.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한 악취 나는 분노와 증오의 거름을 파내고 사과나무 사이로 사랑과 치유의 첼로 선율이 흐르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어쩔 수가 없는 세상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고 섬기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다시, 한국교회가 희망이다! 찌든 성장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증오의 살인 대신 생명 존중과 영혼 구원에 매진한다면.
소강석 새에덴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