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곡가 가브리엘 포레(1845~1924)의 곡 중에 ‘빠삐용(나비)’이라는 곡이 있다. 포레는 이 곡에 그냥 ‘첼로를 위한 소품’이라는 제목을 붙이려고 했는데, 곡을 들은 출판업자가 빠삐용으로 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화가 난 포레는 나비든 똥파리든 상관없다고 대답했다고 전해진다. 곡을 들어보면 출판업자가 왜 제목을 빠삐용으로 하자고 했는지를 느낄 수 있다. 곡의 도입부에 나비의 가벼운 날갯짓을 연상시키는 음이 계속된다. “빠삐용이라는 제목이 이렇게도 잘 들어맞는데 포레는 왜 화까지 났을까?” 하는 의아함이 들 정도다.
작곡가들은 이러한 상징적인 제목을 붙이지 않으려 하는데 오히려 주변 사람들이 적절한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꽤 있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으며 철학을 하는 나는 “그래 작품의 성격을 규정당하는 것은 부담스럽긴 하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인간은 규정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은 ○○○한 사람이야”라는 말은 꽤 부담스럽다. 칭찬이 아니면 상당히 불쾌해지고 설사 칭찬일지라도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한다. “왜 나를 함부로 규정하지?” 하는 거부감을 느끼게 된다. 누군가가 나에 대해 규정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나의 존재를 제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나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할 건데 그걸 당신이 왜 규정하는가?”의 저항감인 것이다.
인간은 가능성의 존재다. 나의 가능성을 제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봐주는 사람이 좋다. 반대로 나의 가능성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고 나의 가능성을 믿어주지 않는 사람은 싫다. 그래서 타인을 있는 그대로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다. 있는 그대로 보려면 상대방에 대한 나의 소망을 내려놓아야 한다. “너는 ○○○한 방식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나만의 전제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가 좋은 성적표를 가져오기를 기대하는 부모 앞에서 정작 아이는 학교를 가지 않는다. 그런 아이한테 왜 학교를 가지 않느냐고, 학교를 가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니냐고 아무리 외쳐봐야 소용이 없다. 아이는 문을 걸어 잠글 뿐이다. 닫힌 문 앞에서 절망하던 부모는 왜 무엇이 아이로 하여금 문을 걸어 잠그게 하는지, 아이는 어떤 고통을 느끼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지를 고통스러운 심정으로 알아보게 된다. 부모가 뼈를 깎는 심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내려놓고 아이의 고통에 마음을 기울일 때 아이와 소통이 되기 시작한다. 부모가 아이에 대한 이러저러한 바람을 내려놓고 아이라는 존재 자체에 집중할 때에야 아이는 사랑받는다고 느끼게 된다.
누군가에 대한 내 욕심을 모두 내려놓고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떠한 재단도 받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으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라는 시가 그렇게도 사랑을 받은 이유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