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아-듀’ 구달, ‘아-듀’ 우리

입력 2025-10-17 00:34 수정 2025-10-17 09:30

숨지기 직전까지 기후위기
심각성 알린 구달… 그 책임
이제 우리 모두 이어받아야

프랑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을 말하는 윤리학으로 오랫동안 서양 철학의 중심이었던 ‘존재론’을 흔들어 놓았다. 아우슈비츠의 비극 앞에서 서구 문명이 쌓아온 ‘존재 지식’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봤던 것이다. 그는 인류가 저지른 학살의 무고한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일을 자기 철학의 기초에 놓았다. 그것은 단순히 추모식을 매년 반복하거나, 학살자를 찾아 처벌을 받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애도는 희생자들의 죽음이 세계에서 반복되지 않도록 또 다른 폭력 속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심과 책임을 무한히 묶어 놓는 것이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그가 타자에 대한 책임을 너무 과장한다고 불편해했다. 그러나 폭력의 시간을 건너온 20세기 인류에게 레비나스만큼 진실한 반성과 위로를 준 철학자는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오랫동안 우정을 나눠온 자크 데리다는 ‘아듀(Adieu)’라는 제목의 긴 조사(弔詞)를 장례식에서 낭독했다. 프랑스어로 ‘아듀’라는 말은 영영 다시 못 보게 될 사람에게 하는 인사말이지만, 데리다는 이 말이 원래 ‘아-듀(à-Dieu)’, 우리말로 ‘신-에게로’ ‘신-앞으로’라는 의미가 있음을 상기했다. 이제 레비나스가 이 세상을 떠나 신에게로 돌아가게 됐음을 장례식에서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사가 끝나갈 무렵 참석자들은 ‘아-듀’가 레비나스가 신에게로 돌아갔다는 슬픈 사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비나스가 생전에 그토록 고투했던 ‘타자에 대한 무한 책임’이 그를 애도하는 모든 이들을 ‘신-앞으로’ 불러 모아 그 책임을 대신 이어받도록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물행동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이 ‘신-에게로’ 돌아갔다. 신문 지면과 SNS에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사가 놀랍도록 이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동물에 대한 인류의 무지, 정확히 말해 ‘서양 문명’의 무지를 깨고 완전히 새로운 이해를 줬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로 개미굴에서 개미를 빼먹는 장면을 관찰해 발표했을 때 서양 철학과 신학이 오랫동안 인간 우월성의 증거로 들어왔던 ‘인간만이 사용하는 도구’의 명백한 반례가 제시됐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열대 숲 야생 침팬지 무리 곁에서 장기적으로 생활하며 관찰했던 그의 독특한 연구 방식 덕분이었다. 당시 동물행동학계는 동물과 감정적 관계를 맺거나 관여하는 일을 엄격하게 금하고 번호를 붙여 관찰했다. 하지만 구달은 침팬지 하나 하나에게 이름을 붙이고 각각의 고유한 성격과 기질을 발견했다. 무리 내부의 사회적 상호작용과 권력 관계를 관찰하기도 했다. 그것은 단순히 동물행동학의 패러다임 전환이 아니었다. ‘인간’만이 ‘정치적 동물’이자 ‘사회적 존재’라고 가르쳐 온 철학과 신학을 향해 완전히 새로운 지적 작업으로 다시 태어날 것을 요청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애도 행렬에는 유독 제6차 대멸종의 시대에 맞선 그의 투쟁사에 존경을 표하는 말들이 많았다. 구달은 91세가 될 때까지 전 세계를 누비며 인간 탐욕이 발생시킨 기후 위기가 파괴하는 열대와 산호초의 비극을 알리는 데 혼신을 다했다.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고 젊은이를 교육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사후 공개된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최후의 희망에 대한 열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울림의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가슴 벅찬 인터뷰 끝에 구달은 자신이 하늘에서 우리를 지지하며 지켜볼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주 흔한 끝인사로 자기 죽음을 담담히 알렸다. “God Bless you all.” 나는 이 말이 단순히 영어식 이별 인사로 들리지 않았다. ‘신-에게로(à-Dieu)’ 돌아간 구달이 우리를 다시 ‘신 앞으로(à-Dieu)’ 불러 모아 자신이 평생 짊어지고 온 책임을 이어받도록 요청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 행성의 모든 존재자를 위한 무한 책임으로 우리를 묶어 놓은 것이다. 쉽게 끝낼 수 없는 애도를 남긴 것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부교수
호크마교양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