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 시간대와 명절 연휴마다 약을 구하지 못하는 불편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편의점 안전상비약 제도는 13년간 13개 품목 허용에 머물러 있다. 지난 추석 연휴에도 편의점 상비약 수요가 급증하며 제도 개편 논의의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고 있다.
15일 GS25에 따르면 이번 추석 연휴(10월 3~9일) 안전상비약 매출은 전월 동요일 대비 83.5% 증가했다. 같은 기간 CU에서도 77.9% 늘었다. 편의점 업계는 명절마다 안전상비약 점별 보유 물량을 3~5배가량 늘리며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안전상비약 약국 외 판매 제도는 약국이 문을 닫는 심야·공휴일에 의약품 구입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2012년 약사법 개정으로 도입됐다. 현재 편의점에서 판매할 수 있는 품목은 해열진통제, 소화제, 감기약, 파스 등 4개 효능군 13개 품목이다. 그러나 이 중 ‘어린이용 타이레놀정 80㎎’과 ‘타이레놀정 160㎎’은 생산이 중단돼 사실상 11개 품목만 남았다. 일반의약품 중 성분과 부작용 등을 고려해 20개 품목 이내로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정하게 돼 있지만 13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재조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판매 데이터를 보면 편의점 상비약 수요는 약국이 문을 닫은 시간대에 집중됐다. GS25에 따르면 상비약 매출의 57.1%가 오후 6시부터 오전 6시 사이에 발생했다. 주말 매출 비중도 36.3%에 달했다. 읍·면 단위 편의점 1500여개의 상비약 평균 매출이 일반 매장 대비 약 10.5%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약국 접근성이 낮은 시간대와 지역에서 편의점이 대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확인되는 대목이다.
편의점 업계는 화상연고, 지사제, 인공눈물 등 오남용 위험이 낮은 품목부터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약국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약을 구하기 어려운 시간대의 공백을 메우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서울의 한 편의점에서 근무하고 있는 강신혁(26)씨도 “늦은 밤 지사제를 찾는 분도 있는데 편의점에선 판매가 안 돼서 안타까울 때가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의 요구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안전상비약 시민네트워크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편의점 안전상비약 품목 확대 필요성에 동의한 비율은 2023년 62.1%에서 올해 85.4%로 크게 뛰었다. 응답자들은 ‘새 효능군 추가’(46.7%)와 ‘증상별 세분화’(44%)를 우선 과제로 꼽았다.
반면 대한약사회 등 약사 단체는 오남용 우려를 이유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다. 대한약사회 관계자는 “건강과 안전 문제는 보수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복약 상담이 가능한 공공심야약국을 활성화하는 등 근본적인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타이레놀이 상비약으로 지정된 뒤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접근성 확대로 불필요한 복용이 많아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정부의 미온적 태도를 지적한다. 이주열 남서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합의를 통해 도입된 제도임에도 단종된 품목의 대체 지정 같은 조치조차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국민의 요구가 높고 외국에서도 큰 문제 없이 운영되는 제도인 만큼 복지부가 더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2018년 지정심의위원회를 열고 제산제, 지사제 등 신규 지정 등을 논의했으나 결론 내지 못했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도 후보자 시절 “사용 안전성과의 균형을 고려해 검토할 사안”이라고 밝혔으나, 구체적인 조치로는 이어지지 않고 있다.
신주은 기자 ju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