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프리즈 서울 아트페어 때 한국을 찾은 미국의 한 미술관 큐레이터는 국립중앙박물관에 갔다가 두 번 놀랐다.
개장 전부터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한국인이 전통문화를 이렇게 사랑하는구나’ 싶어 우선 놀랐다. 한데 막상 개장하자마자 그 긴 줄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발길이 향하는 곳이 박물관 ‘굿즈’를 파는 아트숍인 걸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K팝과 한국 전통문화를 엮은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케이팝데몬헌터스’, 약칭 케데헌 열풍이 여전히 뜨겁다. 그런데 이 외국 큐레이터가 국립현대미술관을 방문해 관계자에게 전한 에피소드는 열풍의 진정성에 의구심을 느끼게 했다. ‘오픈런’ 끝에 구입한 갓 열쇠고리(키링), 까치호랑이 배지 등이 중고 거래 사이트에 비싸게 되팔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허탈하기까지 했다.
사실 케데헌은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처럼 한국에서 제작해 세계에서 사랑받은 문화콘텐츠가 아니다. 갓, 호랑이 등 한국 문화와 이미지를 활용하긴 하지만 실제로는 북미(미국·캐나다) 제작진이 주도한 미국 애니메이션으로 할리우드 플랫폼에서 만들어졌다. 서구의 시선이 투영된 한국 전통문화인 것이다.
한국인이 개항 이후 선망해 마지않은 서구인이 좋다고 하니 그걸 상징하는 굿즈를 소유하고, 소유함으로써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케데헌 열풍에서 읽혔다.
우리 안의 서구 콤플렉스를 지난 8월 말 세종문화회관에서 공연된 서울국악관현악단의 ‘웨이브’에서도 느꼈다. 공연은 조선시대 화가 단원 김홍도가 대동강에서 배를 타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을 그린 ‘월야선유도’에서 영감을 받아 기획됐다.
한국 전통문화에서 한강, 공무도하가 등 물의 이미지와 관련한 설화, 역사를 접목한 작품을 개발해 국악 관현악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호기로운 시도였다. 정작 공연 제목은 ‘한강’도 ‘물결’도 아닌 영어 ‘웨이브’였다. 영어를 쓰면 세련돼 보일 거라 생각하는 서구 콤플렉스가 여전히 작동한다.
케데헌 열풍으로 까치호랑이와 함께 인기 있는 갓을 보자. 외국인의 시선에서 갓이 주목받는 건 당연하다. 19세기 말 개항기 서양인에게 한국은 모자의 나라로 각인됐다. 영국인 F A 매켄지도 ‘대한제국의 비극’(1908)에서 “그들은(조선인들은) 별난 모자를 쓰는데, 이는 말총이나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어떤 것은 엄청나게 크다”라고 썼다.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 민속박물관에는 주립, 백전립, 전립, 흑립, 패랭이, 초립, 대감투, 승관, 탕건, 정자관, 방건, 흑건, 남바위, 아얌, 굴레, 족두리, 송낙, 방립, 삿갓, 갈모 등 한국 전통 모자 수집품만 20가지가 넘는다. 조선시대는 모자로 계급과 신분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이에 주목해 2011년과 2017년 전통 모자를 주제로 전시를 열었지만 히트치지 못했다. 내국인에게 주목받지 못한 갓은 개항기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 다시 서구인의 시선을 담은 케데헌 열풍 덕에 소환됐다. 그래서 갓의 재부상을 보는 마음은 씁쓸하다.
변화의 싹은 있다. 올해 뉴욕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미국 연극·뮤지컬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토니상을 거머쥔 한국 창작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은 좋은 예다. 핵심 제작자인 작가 박천휴는 주인공 로봇 올리버가 키우는 식물 이름을 영어 ‘폿(Pot)’이 아닌 한국어 그대로 ‘화분(Hwaboon)’이라고 지었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재미에서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재미를 넘어 진심이, 그리고 자긍심이 따라야 한다. 폿이 아니라 화분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자신감, 진정성이 한국 전통문화로 확산됐으면 좋겠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