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책임한 포퓰리즘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가로서 긍지와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 아닌 감정적인 판단이 중시돼 국가의 진로를 그르친 역사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편협한 내셔널리즘과 차별·배외주의를 용납해선 안 됩니다.”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가 최근 발표한 ‘전후 80년 소감’ 중 일부인데, 자민당 내 중도·온건·리버럴(liberal·진보적 자유민주주의자) 정치인 이시바의 시각이 잘 담겨 있다. 이번 소감을 두고 본국 일본에선 평가가 시원찮지만 한국에선 ‘명문’이라는 상찬이 많이 들렸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사죄가 없고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는데도 호평이 나온 게 신기했다.
소감 전문을 읽어보면 시종일관 차분하다. 과거 일본이 전쟁을 피하지 못했던 이유를 당시 헌법, 정부, 의회, 언론 등의 문제로 나눠 조목조목 짚었다. 그러면서 “과거를 직시하는 용기와 성실함, 타인의 주장에 겸허히 귀 기울이는 관용을 가진 리버럴리즘과 건전하고 강인한 민주주의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 수반이 전쟁 책임에 관한 성찰적인 메시지를 내놓은 건 바람직한 일이지만 뒷맛이 씁쓸하기도 하다. 이렇게 잔잔한 메시지를 당내 강경파의 반발 때문에 패전일(광복절)에 내놓지 못하고 뒤늦게, 그것도 정부 공식 입장이 아닌 총리 개인 메시지로 내놨기 때문이다. 게다가 총리 본인이 ‘갈참’이 돼서야 겨우 소신 표명을 한 것이어서 더욱 힘이 떨어진다.
중도·온건·리버럴의 설 자리가 그만큼 없어졌다는 얘기다. 새 총리로 유력한 ‘강경 보수’ 다카이치 사나에 자민당 신임 총재는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가 최고여서 그 이상의 메시지는 필요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최근 한 대담에서 “권위주의 물결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며 “중도 우파나 중도 좌파 정부가 국민과 단절되고 국민의 기본적인 희망과 꿈을 실현하지 못해 정부에 대한 좌절감이 쌓인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특히 유럽에서 극심하다. 유럽의 세 기둥을 이끄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는 각기 소속 정당의 색깔은 다르지만 모두 중도적 정치를 지향한다. 하지만 핵심 이슈인 이민과 경제 문제, 사회 갈등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해 지지율이 바닥을 기고 있다. 그 반대급부로 세 나라 공히 극우 야당이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중이다. 오바마는 중도 정치인들이 유권자 정서를 놓치고 포퓰리즘적인 분노가 자리 잡도록 방치했다고 지적했다. 이시바도 이에 해당된다. 그는 집권 내내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당연히 인기가 없었다. 오바마는 업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재임 때 인기는 확실히 많았다.
중도 정치가 힘을 잃은 자리는 포퓰리스트들이 꿰차고 있다. 미국의 역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는 국가주의적 포퓰리스트를 가리켜 “영원의 정치학(politics of eternity)을 행하는 정치인”이라고 했다. 영원의 정치학은 영광스러운(실은 존재한 적 없는) 과거를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이를 파괴한 외부의 적을 상정한다. 인도 출신의 국제정치 전문가 파리드 자카리아는 “많은 사람에게 희미하게 기억되는 과거의 황금기는 사회의 광범위한 영역이 권력과 번영에서 배제됐기에 실상은 그다지 빛나던 시기가 아니었다”며 “상상 속의 안락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거짓을 말하는 포퓰리스트와 무기력한 중도 정치인 중 누구를 택해야 하나.
천지우 국제부장 mogu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