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늬만 치료보호시설, 무심한 치유 손길… 마약 중독 치료의 현실

입력 2025-10-18 00:02 수정 2025-10-18 00:02
게티이미지뱅크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으로 지정된 경기도 A병원은 수년 전부터 마약 환자를 받지 않고 있다. 병원 측은 연간 1~2명밖에 되지 않는 마약 환자를 위해 전담 병동과 인력을 유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A병원처럼 ‘무늬만’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인 곳이 많다. 전국 31개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 중 지난해 치료 실적이 하나도 없는 기관은 절반에 가까운 14곳에 달했다. 환자가 자발적으로 치료를 신청하거나 수사기관이 의뢰하지 않을 경우 대부분 병원은 환자 수용을 피하기 때문이다. 날로 늘어나는 마약 환자를 담당할 수 있는 전문적인 치료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마약사범은 2만3022명으로 10년 전(2014년) 9984명보다 배 이상 늘었다. 이 중 투약 사범은 9528명으로 전체 마약사범의 41.4%를 차지했다. 하지만 이 중 지난해 전문 치료기관을 통해 치료받은 사람은 875명(9.2%)에 불과했다. 중독성 있는 마약을 투약하고도 10명 중 9명은 전문 치료 없이 사회로 복귀하고 있는 셈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현행 치료보호제도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다. 마약 투약 사범은 검찰의 치료조건부 기소유예 처분이나 자발적 신청을 통해 치료보호기관에서 최장 12개월간 치료를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검찰 의뢰로 치료를 받은 인원은 극히 적다. 2022년 전체 마약 투약 사범 8489명 가운데 4718명(55.6%)이 기소유예를 받았지만, 이 중 치료조건부 기소유예는 단 14명(0.2%)에 불과했다.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의 치료·재활교육 프로그램을 수강하는 교육 이수 조건은 1258명(14.8%)이었다. 보호관찰소의 선도 조건부 기소유예는 281명(3.3%)이었다. 3165명(37.3%)은 별도의 조건 없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마약 중독자들은 치료 사실이 알려질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에 병원 방문 자체를 꺼리기도 한다. 이해국 가톨릭대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17일 “검찰의 처분은 전문치료보다 상담 분야에 치우쳐 있으며 치료가 환자의 자발성에 크게 기대고 있다”고 말했다.이 교수는 “마약 중독도 질병이지만 현행 법체계는 여전히 단속·처벌 중심 관점에 머물러 있다”며 “단속법에 치료보호 조항 하나를 끼워 넣는 수준으로는 의료 시스템이 작동할 수 없다”고 말했다.

마약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은 쏠림 현상이 심화된 모습이다.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은 마약 복용 여부를 감정할 수 있는 기기 및 장비, 정신건강전문의 등을 갖춘 병원 중 지정된다. 현재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으로 지정된 31개 병원 중 인천 참사랑병원과 국립부곡병원 두 곳이 전체 치료 실적의 74.3%(650명)를 차지했다. 치료실적이 전무한 병원들은 대부분 분리 병동과 전문 인력 등 인프라 부족을 가장 큰 한계로 꼽았다.


경기도 B병원 관계자는 “통상 일반 환자보다 정신응급 환자는 두 배, 마약 환자는 세 배로 관리가 어렵다”고 말했다. C병원 관계자는 “마약 환자 한 명을 제대로 보려면 24시간 운영되는 분리 병동에서 간호사만 최소 4명이 필요하다”며 “정신과 안에서도 알코올·마약·도박 중독은 접근법이 다르지만 세분된 지원이 없다”고 말했다. 다른 병원 관계자는 “마약 환자는 분리 병동에서 고강도의 전문 치료를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며 “현재 인력으로는 감당이 어려워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 지정 취소를 요청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마약 중독 치료보호기관 31곳 중 9곳에 연 1억~3억원의 운영비를 지원한다. 하지만 의료 현장에서는 마약 치료 인프라를 확보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D병원 관계자는 “예산이 몇몇 병원에만 집중돼 다른 병원은 운영이 어렵다”고 말했다.

환자가 몰리는 병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인천참사랑병원 다음으로 환자를 많이 받는 치료보호기관인 국립부곡병원 측은 “입원뿐 아니라 외래환자에게도 지속적인 상담과 약물처방, 자조모임, 단약검사 등 여러 치료를 운영하고 있다”면서도 “마약사범 중 상당수는 치료받을 수 있는 제도 자체를 몰라 교정시설에 직접 나가 홍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 마약관리센터를 운영하는 은평병원 역시 인프라 확충에 나서고 있지만, 전문 인원 자체가 부족한 데다 민간병원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급여 등의 문제로 의료진 충원이 쉽지 않다.

마약 중독 치료는 단약 모니터링, 인지행동치료(CBT), 신체질환 검사, 12단계 프로그램 등 다층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병원 차원에서 전문 인력을 양성하기 쉽지 않다. 또 마약 중독은 완전한 안정화 단계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다. 재발 가능성이 큰 만큼 치료 인원을 추적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복지부 관계자는 “전문 치료인력 양성 교육 과정을 올해부터 개발 중이며, 치료기관 간 연계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마약 중독 치료를 ‘공중보건 영역’으로 규정해 전폭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마약 중독은 개인 일탈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 문제”라며 “국가가 암센터를 세우듯 중독 전문병원을 설립하고, 전문 인력 양성과 통합적인 치료 인프라 구축을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찬희 기자 becom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