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스스로를 자유인이라 부릅니다. 억압적인 체제가 무너지고 정보는 넘쳐나며, 원하는 것을 언제든 소비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우리는 자유로운 걸까요.
사회학자 닐 포스트먼은 1985년 발표한 명저 ‘죽도록 즐기기’의 서문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단서를 던집니다. 그는 조지 오웰의 ‘1984’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는 두 디스토피아 소설을 비교하며 현대사회를 진단했습니다. 오웰이 경고한 미래는 외부의 폭정이었습니다. 감시와 억압, 통제하는 전체주의 정부가 개인의 권리를 강제로 빼앗는 세상입니다. 반면 헉슬리는 다른 형태의 노예 상태를 그렸습니다. 그것은 내부의 쾌락, 편안함, 그리고 즐거움에 자발적으로 묶인 노예 상태였습니다. 사람들은 약물과 오락에 탐닉하며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사유 능력을 포기합니다. 포스트먼은 현대사회가 오웰의 예측보다는 헉슬리의 예측에 가깝게 흘러가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우리는 감옥의 철창이 아닌 스스로 택한 ‘즐거움의 덫’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포스트먼이 현대의 위기를 진단하는 핵심 전제는 “형식이 내용을 배제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특정 매체가 담을 수 있는 사상과 논리의 수준을 제한한다는 의미입니다. 그가 살았던 1980년대는 텔레비전이 지배적인 매체였습니다. 포스트먼은 텔레비전이 합리적인 논증과 복잡한 사유를 필수적으로 요구하는 책과는 달리, 시청자의 쾌락을 충족시키기 위해 정보의 질을 낮추고 모든 것을 오락으로 변질시킨다고 폭로했습니다. 교육 종교 정치 언론 등 중요한 공적 영역까지 오락의 형태로 포장돼 버린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정보 과식증에 걸려 진짜 중요한 것을 구별하지 못하게 됩니다. 매일 수많은 정보와 자극을 소비하지만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무감각함에 빠집니다. 텔레비전과 오락 산업은 현대인을 마비시키는 ‘쾌락의 약’이 된 것입니다. 포스트먼은 섬뜩한 결론을 내립니다. “미래의 인간은 채찍이 없어도 스스로 즐거움에 묶여 살 것이다.”
포스트먼이 이 책을 쓴 1985년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이 ‘죽도록 즐기기’에 훨씬 더 깊이 몰두하고 있습니다. 텔레비전보다 훨씬 자극적이고 개인화되며, 중독성 강한 스마트폰 화면 속에 우리의 의식과 시간이 갇혀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를 외치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자극, 타인과의 비교, ‘더 빨리, 더 많이, 더 완벽해야 한다’는 내면의 압박에 묶여 있습니다. 특히 생산성과 경쟁이 압도하는 우리 사회의 현실은 이 내면의 속박을 가속화합니다. 회사에서의 실적, 학교에서의 성적, 가정에서의 비교가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듯합니다. 우리는 쉼을 잃고 관계 대신 성과를 선택하며 결국 자신이 만든 시스템의 노예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헉슬리가 경고했던 쾌락의 폭정, 오늘 우리의 내면을 잠식하는 가장 현대적인 속박입니다.
성경은 이 보이지 않는 속박으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을 선언합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요 8:34, 36)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방종이 아니라 우리를 묶는 죄와 쾌락의 사슬이 끊어진 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기쁨으로 행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속받았을 때, 그 피는 우리를 붙드는 모든 속박을 끊었고, 성령은 우리 안에 내려오셔서 이 순종할 자유를 선물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쾌락과 성과에 묶여 ‘하지 못하는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할 수 있는 은혜의 사람’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내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기꺼이 사는 데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실 때, 순종은 의무나 억압이 아니라 감사와 기쁨이 됩니다.
자유를 외치며 스마트폰과 성과라는 감옥에 갇힌 시대, 우리를 향한 궁극적인 초대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종이 되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완전하고 진정한 자유입니다. 그 자유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까.
(안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