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시작한 지 15년. 초창기만 해도 마라톤 완주는 인간 승리의 드라마라고 할 정도로 일반인에겐 쉽지 않은 도전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 죽어가던 내게 풀코스 100번째 길을 허락하셨다.
2008년 6월 1일 일요일 열리는 제13회 제주마라톤축제를 앞두고 대회 측에 완주 100회 달성 계획을 알렸다. 그 전주에 98회 완주를 한 상태였다. 100회를 달성한다는 건 제주마라톤 전날 열리는 대구금호강마라톤도 풀코스 완주한다는 의미였다. 완주 일주일 만에 토요일과 일요일 연달아 풀코스를 달린다는 건 몸보다 마음의 싸움이었다. 토요일 대회에서 무너지면 모든 계획이 어긋난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히 몸을 준비시켰다.
5월 31일 토요일, 제17회 대구금호강마라톤에서 99번째 완주를 향해 달렸다. 시간이 갈수록 열기가 올라 더위를 뚫고 나아가야 했다. 그래도 2시간 52분대, 우승이었다. 대회를 마치자마자 부산으로 이동해 다시 비행기를 타고 늦은 밤 제주에 도착했다. 몸은 뻣뻣했지만 마음은 이미 결승선을 보고 있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의 길을 허락하시면서 그보다 더 큰 영광의 길도 함께 열어주셨다. 내가 잘나서 받는 영광이 아니라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받으실 영광이었다.
제주마라톤축제는 일본 초청 선수들과 외국인 참가자들로 붐볐다. 전날 풀코스를 달린 다리엔 미세한 통증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100번째 완주에는 단 한 점의 타협도 두고 싶지 않았다.
제주의 바람은 세차게 불었고 도로 위의 공기는 뜨거웠다. 반환점을 돌 무렵, 선두와의 격차는 2㎞ 이상 벌어졌다. ‘오늘은 그냥 완주에 만족하자’는 상심과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마음 사이 갈등하다 다잡았다. 25㎞ 지점에서 준비해 간 BCAA(피로 회복과 근육 회생을 돕는 아미노산 영양제) 알약과 물을 삼킨 순간 이상하게도 몸이 깨어났다.
‘내일은 없다. 오늘을 다 태우자.’ 달려온 세월이 스쳐 갔다. 쓰러지듯 들어온 결승선, 새벽의 트랙, 땀에 젖은 운동화와 함성. 몸은 고통스러웠지만 마음은 맑았다. 200m 앞의 선수를 따라잡으면서 다리가 다시 살아났다.
추월은 마라톤이 주는 또 다른 희열이었다. 그때부터 다리는 내 의지보다 먼저 반응했다. 또다시 추월. 결승선을 향해 폭풍처럼 질주했다. 골인 지점 2㎞ 전 건물 모퉁이를 돌자 앞선 이의 그림자가 보였다. 주먹을 쥐었다. 비 온 뒤 꽃망울이 터지듯 힘이 솟았다. 다리는 나비처럼 가볍고 숨은 칼날처럼 매서웠다. 마지막 1㎞, 앞서 달리던 강병성 선수에 따라붙어 막판 스퍼트를 벌였다. 마라톤 불변의 법칙은 뒤에서 추월하는 선수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남은 거리가 좀 더 길었으면 하는 아쉬움 속에 일본 선수들이 나란히 1, 2위를 차지하고 나는 2시간 42분 32초로 3위에 올랐다. 무엇보다 100번째 드라마를 완성했다. 마라톤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42.195㎞를 달리는 동안 어떤 일이 일어날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특히 이날처럼 기온이 올라가는 날은 말이다. 기록보다도 주어진 길을 끝까지 달려왔다는 사실이 더 벅찼다. 나는 두 손을 들어 하늘을 향했다. “하나님, 저를 살리시고 여기까지 오게 하신 분이 당신이었습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