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훈 칼럼] 결핍의 고리에 갇힌 한국 정치

입력 2025-10-15 00:50

풍요의 시대 누리는 인류가
가짜 결핍에 빠져 허덕이듯

여당도 ‘더 센’ 특검을 무기로
슬롯머신에 빠진 중독자처럼
정치 보복의 강도만 높여가

스포츠 경기처럼 더 세게 아닌
힘 빼기가 올바른 정치력 발휘

풍요의 시대다. 냉장고 음식은 썩은 채 버려지고, 장롱엔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이 쌓여간다. 손가락 까딱하면 밤사이 물건이 문 앞에 도착하고, 휴대전화 속엔 끝없는 뉴스와 영상, 댓글이 넘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늘 허기에 시달린다. 더 좋은 집, 더 높은 직위, 더 많은 ‘좋아요’를 원한다. 충만 속의 결핍, 바로 이것이 미국 대학교수이자 칼럼니스트인 마이클 이스터가 저서 ‘가짜 결핍(Scarcity Brain)’에서 진단한 통찰이다.

인간의 뇌는 자원이 부족하던 시절, ‘더 많이’ 찾아 움직이며 진화했다. 이 생존 본능이 지금은 ‘결핍의 고리(scarcity loop)’에 갇혔다. 슬롯머신에 빠져들 듯 ‘기회의 발견-예측 불가능한 보상-즉각적 반복 가능성’이라는 유혹에 갇혀 도박·SNS·과소비 같은 중독적 행동을 낳는다. 아무리 채워도 허전하다. 이스터는 이를 깨닫는 순간을 하나의 레고 실험으로 보여준다. 구조물이 흔들리자 건축가 아버지는 블록을 더 얹으려 했지만, 세 살배기 아들은 몇 개를 빼서 문제를 해결했다. 채움이 아닌 덜어냄이 구조를 살린 것이다.

스포츠 경기에서도 위기일수록 ‘더 세게’보다 ‘힘을 빼고 정확하게’라야 효험을 볼 수 있다. ‘야구가 10배 더 재미있어지는 55가지 이야기’(김종건 저)에는 미국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투수 시절(1992~95년) 사이영상을 4차례나 받은 그레그 매덕스가 소개된다. ‘교수님’이란 별명에서 엿볼 수 있듯, 그는 구속을 올리기보다 정확한 제구와 타자 심리 읽기, 공의 궤적 조절 능력으로 타자들을 농락했다. 최동원·선동열·류현진 등 한국 레전드 투수들의 공통점도 ‘제구’였다. 골프의 드라이버 역시 ‘힘 빼고 리듬 지키기’가 거리를 낸다. 힘만 잔뜩 들어간 스윙은 겉으론 통쾌해 보여도 OB나기 십상이다.

최근 한국 정치도 갈수록 더 센 선택이 기승을 부린다. 내란 특검, 김건희 특검, 채 상병(채해병) 특검 등 3대 특검이 칼날을 동시에 휘두르고 있고, 이마저 성에 차지 않은 듯 특검 수사 기간을 더 늘리는 개정안까지 국회를 통과했다. 이어 검찰청을 폐지하고 새 수사·기소 체계를 세우는 정부조직법 개정안도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헌법 쟁점과 제도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커져만 간다. 그 충격은 특검 내부까지 번졌다. 특검팀에 파견된 검사들이 “수사 마치면 원대 복귀”를 요구하는 입장문을 내며 집단행동 논란이 일었다.

무엇이 이런 ‘더 세게’를 부추겼을까. 결핍의 고리는 정권과 야권, 권력과 반권력 모두에게 작동한다. 정치는 ‘예측 불가능한 보상’ 즉각적인 지지율 상승, 편가르기 동원, 상대 진영의 굴복을 좇을수록, ‘한 번 더’ ‘조금만 더’ 강한 수단에 끌린다. 그 결과는 뻔하다. 제도는 엉성해지고, 단죄의 절차는 단축되며, 현장은 혼돈의 늪에 빠져든다. 결핍의 고리는 개인의 의지 부족이 아니라 설계된 환경과 진화한 뇌가 빚어내는 결과라는 통찰은, 한국 정치에도 그대로 겹친다.

이대로 가다간 우리 정치판은 슬롯머신 도박장으로 전락할 것이다. 특검이 늘고 수사가 반복될수록, 정권을 잡은 여당의 정치 보복이라는 의심만 키울 뿐이다. 보복은 더 세야 만족하는 도박처럼, 만족을 모르는 욕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절실한 것은 ‘덜어내기’와 ‘정확성’이다. 이미 가동 중인 특검 수사를 ‘더 세게’ 늘리는 유혹보다, 중복·과잉을 줄이고 충돌 규범을 정교화하는 편이 제도 신뢰에 유익하다. 목표도 정확해야 한다. 누가 이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규명하고 어떤 재발방지 장치를 만들 것인가가 우선돼야 한다. 그러면 개혁의 속도보다 품질을 보게 된다. 검찰청 폐지라는 구조개편이 불가피했다면, 이행 로드맵·보완수사권·공소유지 주체의 분장 등 세부 설계를 먼저 명확하게 제시했어야 한다. 지금 제기되는 헌법·시스템 공백 우려는 “더 세게”가 “더 정확하게”를 앞질렀다는 방증이다.

보복의 욕망에 중독된 뇌가 시키는 대로 ‘자극’을 더하며 상대를 제압하려는 순간, 정치는 스스로의 품위를 깎고 제도를 위험에 빠뜨린다. 필요한 것은 힘을 빼는 용기, 덜어내는 결단, 그리고 정확성에 대한 집요함이다. 레고의 몇 블록을 뺐더니 구조가 단단해졌듯, 과잉을 덜어낼 때야 비로소 제도는 안정된다. ‘더 세게’가 아닌 ‘힘 빼고 정확하게’ 그것이 결핍의 고리를 끊는 정치의 시작이다.

이동훈 논설위원 dh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