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큐 트럼프(Thank You, Trump).”
지난 11일부터 이스라엘 텔아비브 ‘인질광장’에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구호가 넘쳐났다. 트럼프의 가자 전쟁 휴전 중재로 하마스로부터 풀려나는 이스라엘 인질 가족들의 인사였다. 연단에 오른 스티브 위트코프 백악관 중동특사, 트럼프의 사위 제러드 쿠슈너 등이 자국 총리인 베냐민 네타냐후의 역할을 칭찬할 때 야유를 보냈던 인질 가족은 트럼프를 향한 찬사에는 “생큐 트럼프”라며 환호했다. 지난 1월 취임 뒤 전 세계에서 8개의 전쟁을 해결했다는 트럼프의 자화자찬은 대다수 세계 시민의 귀에는 허황되고 코믹하게 들린다. 하지만 하마스의 지옥 같은 감옥에서 돌아온 이들과 그 가족들에게 트럼프는 노벨평화상을 받아도 모자랄 ‘평화의 전령’이다. 누군가에게 트럼프는 진짜 피스메이커(Peacemaker)다.
올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베네수엘라 야권 지도자 코리나 마차도에게도 트럼프는 자유 진영의 리더다. 마차도는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엑스에 “이 상을 고통받는 국민과 우리의 대의에 단호한 지지를 보내준 트럼프 대통령에게 바친다”고 말했다. 마차도의 발언은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독재 정권을 압박하고 있는 트럼프를 지렛대로 사용하려는 ‘아첨외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도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의 한 조각이 있다. 마두로는 2018년 부정선거 논란 속에서도 재집권한 뒤 야당을 탄압하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는 1기 시절부터 마두로를 독재자로 규정하고 선거 결과 자체를 부정했다. 베네수엘라 야당에 트럼프는 분명 민주주의와 자유 세계의 수호자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트럼프의 ‘초상’은 이런 것이다. 관세전쟁을 일으켜 자유무역 질서를 흔든 정치인. 시진핑과 블라디미르 푸틴, 김정은과 같은 독재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문제적 인물. 이웃 캐나다를 ‘51번째 주’라고 부르고 그린란드를 미국에 병합해야 한다고 하는 팽창주의자. 한국 시민의 눈에도 트럼프는 동맹을 돈으로 환산하고 3500억 달러를 ‘선불’로 뜯어내려는 장사꾼 대통령이다. 미국 내에서도 트럼프는 과격한 이민 단속과 주방위군 투입 등으로 나라를 둘로 쪼갠 분열의 상징이다.
하지만 트럼프의 얼굴은 하나로 그려지지 않는다. 가자지구와 베네수엘라에서 우리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트럼프의 낯선 얼굴을 본다. 노벨상 욕망 때문이든, 혹은 정치적 계산 때문이든 트럼프가 가자지구와 베네수엘라에 만들어낸 변화는 무시할 수 없다. 트럼프가 존경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냉전시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부르며 군비 경쟁을 일으킨 ‘매파’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후엔 결과적으로 소련을 붕괴시킨 설계자로도 평가받는다. 정치인과 그 유산에 대한 평가는 복합적이고 역설적이다. ‘힘을 통한 평화’를 내세운 트럼프의 외교가 레이건의 외교와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계 최강국 미국의 대통령은 언제나 세상을 바꿀 힘이 있다. 노벨위원회가 2009년 10월, 취임 9개월밖에 안 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노벨상을 준 것도 핵확산 방지 ‘노력’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의 힘과 가능성은 그만큼 크다. 가자 정상회의에 참석한 파키스탄 총리는 트럼프를 “평화의 사도”라고 부르며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자 역시 트럼프가 언젠가 이 상을 받으면 좋겠다. 다만 정치적 압력의 산물이 아니라 가자 전쟁 중재처럼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킨 노력의 결과이기를 바란다. 트럼프가 권력이 아니라 공로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날이 온다면 세상은 그만큼 더 평화로워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기자도 진심으로 “생큐 트럼프”를 외치며 박수 쳐줄 수 있을 것 같다.
임성수 워싱턴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