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27’ 한국 ‘0’… 5지 선다형 굴레 벗어야 과학노벨상 보인다

입력 2025-10-15 00:05
한국은 ‘빠른 추격자’를 지나 ‘퍼스트 무버’(선도자)로 가고 있지만 과학 노벨상의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교육은 여전히 5지 선다형 평가에 갇혀 시험 인재를 키우는 데 머물러 있다. 왼쪽은 5지 선다형 평가의 상징인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손 모아 기도하는 사진. 오른쪽은 노벨 문학상을 수여하는 스웨덴 한림원 입구. 국민일보DB, 연합뉴스

노벨상 스코어, 기초과학 격차 담겨
선진국과 견주려면 교육 개혁 절실
정답만 찾는 5지 선다형 평가에선
질문은 독이 되고 사색은 시간 낭비

일본에서 또다시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올해 일본은 생리의학상과 화학상을 거머쥐며 2관왕이 됐습니다. 사카구치 시몬 오사카대 교수가 면역학 연구로 생리의학상을, 기타가와 스스무 교토대 교수가 금속유기 골격체(MOF) 개발로 화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사카구치 교수의 연구는 자가면역질환과 암 치료의 길을, 기타가와 교수의 연구는 기후위기와 물 부족 해법을 제시했다는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과학 노벨상은 인류를 한 걸음 더 앞으로 내디디게 한 선도적 연구자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영예입니다. 국가의 수상 횟수는 그 나라의 기초과학 수준과 연구 저력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퍼스트 무버’(first mover·선도자)의 상징과도 같은 상입니다. 일본은 지금까지 27명의 과학 분야 수상자를 배출했습니다. 물리학상 12번, 화학상 9번, 생리의학상 6번으로 기초과학의 모든 분야에서 고르게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한국은 올해도 후보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종종 “이제 일본을 따라잡았다”는 ‘국뽕’에 빠져들곤 하지만 과학 노벨상 스코어 앞에서는 머쓱해질 따름입니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낙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애초에 출발선이 다른 한·일전입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150년 동안 과학기술을 국가 발전의 핵심 동력으로 삼아온 퍼스트 무버였습니다. 예컨대 1920년대 일본 대학 교수들이 개발한 레이더의 원천 기술은 훗날 연합국이 전쟁에서 활용할 정도로 과학기술 수준이 상당했습니다. 일본은 패망했지만 탄탄한 과학기술의 토대는 남아 있었습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와 광복, 그리고 6·25전쟁의 폐허 위에서 출발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벅찼던 시절에 기초과학은 사치였습니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이 ‘빠른 추격자’였습니다. 선진국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하고 응용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 전략은 산업화를 이끌고 정보기술 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지금은 빠른 추격자를 벗어나 퍼스트 무버로 올라서는 과도기라고 봐야 합니다.

노벨상 스코어에 분통을 터뜨릴 일은 아니지만 분발은 해야 합니다. 퍼스트 무버로 올라서기 위한 체질 개선 목록 최상단에는 교육이 위치합니다. 특히 기초가 되는 초·중등 교육으로 초점이 모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의 초·중등 교육은 5지 선다형 평가가 지배합니다. 대학 입시는 초·중·고 교육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대입에서 당락을 가르는 대학수학능력시험과 고교 내신 성적 산출을 위한 정기고사 모두 5지 선다형 중심입니다.

5지 선다형 평가는 빠른 추격자에게 적합한 저비용 고효율의 방식이었습니다. 대입 수험생이 100만명에 달하던 시절 최소한의 비용으로 빠르게 줄을 세우는 역할을 했습니다. 정답과 오답이 분명하기 때문에 논란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빠른 추격자에게나 어울리는 방식이지 퍼스트 무버로 나가기에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수능 100% 전형’처럼 5지 선다형 점수만으로 학생을 평가·선발하는 선진국 명문대를 찾아보긴 어렵습니다. 5지 선다형이 학생의 역량과 잠재력을 온전히 평가하기 어렵다는 점도 있지만, 더욱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5지 선다형 시험에 적용되는 고득점 공식은 동일합니다. 일단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출제자가 설정해놓은 시험 범위 안에서 출제자가 권장하는 풀이과정을 거쳐야 오답 위험을 줄일 수 있습니다. 정해진 시간 안에 모든 문항을 풀어야 하므로 쉬운 문항부터 최대한 빠르게 기계적으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이렇게 절약한 시간은 ‘매력적인 오답’ 같은 함정이 있거나 교육과정을 이리저리 비틀어 놓은 고난도 문항을 푸는 시간에 할애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질문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분초를 다투는 평가에서 출제자에게 의문을 품으면 손해를 보기 십상입니다. 최대한 자기 생각을 억제하고 출제자의 의도에 맞추는 훈련을 하는 게 유리합니다.

독서와 사색, 토론도 시간 낭비가 됩니다. 20%의 맞음과 80%의 틀림만 허용되는 5지 선다형 세계에서 맞고 틀림은 옳고 그름으로 여겨집니다. 다름은 그름이 됩니다. 다름이 설 자리가 없어지면 토론도 무의미해집니다. 질문과 토론이 실종된 문제풀이 교실, 기성세대에게도 매우 익숙한 공교육의 풍경입니다. 청소년들을 이런 환경에 몰아넣고는 “창의력과 상상력이 빈약하다”고 탓하는 것은 몰염치한 일입니다.

이 방식에 철저히 순응하는 학생일수록 교육·연구 환경이 좋은 국내 명문대의 일원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남들과 다른 생각을 즐기고 출제자의 권위에 순응하지 않는 괴짜들은 도태되기 쉬운 시스템입니다.

출제자의 의도를 빠르게 파악하고 내면화하는 기술은 대학생·대학원생의 경우 지도 교수, 직장인이라면 직장 상사, 연구자라면 연구비 주는 스폰서의 요구를 충족시켜줄 때 요긴합니다. 조직에서 유능한 인재가 되는 길입니다. 빠른 추격자 입장에서 5지 선다형 평가가 그리 나쁜 방식이 아닌 셈입니다. 하지만 퍼스트 무버를 지향한다면 시효가 끝난 방식입니다.

노벨상 수상자들의 스토리를 읽다보면 남들이 뭐라하든 자기 길을 묵묵히 걷는 사람들과 만나게 됩니다.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 사람들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세계에서는 정답이나 출제자의 의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5지 선다형의 굴레를 벗겨 정답보다 질문이 중요한 학교 현장을 만드는 게 한국의 ‘노벨상 프로젝트’의 출발점 아닐까요.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