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스타트업 키우라는 모태펀드, 혈세 줬더니 독소조항 수두룩

입력 2025-10-13 18:53
올해 1월 코리아크래프트비어를 상대로 1심 판결에서 투자계약서상 ‘독소조항’을 넣었다는 이유로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한 HB인베스트먼트. HB인베스트먼트 홈페이지 캡처

유망한 벤처기업의 성장을 촉진하기 위해 조성된 정부의 정책펀드가 오히려 벤처기업의 성장을 저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간 투자자’인 펀드 운용사가 기한 내 상장하지 못하면 오히려 투자사에 수십억대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등 무리한 독소조항을 넣어 투자계약을 맺거나 갑질을 부리는 관행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13일 이재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벤처투자가 발견한 모태펀드 운용사의 ‘규약상 투자계약 체결 시 준수사항 위반’ 건수는 184건에 달했다. 2021년 39건에서 2023년 107건으로 3배 가까이 늘어났다.

한국의 모태펀드는 정부가 중소·벤처기업을 육성하기 위해 중간 투자자인 벤처캐피털(VC)에 출자하는 일종의 ‘간접 펀드’다. 그런데 국가 예산을 받은 중간 투자자들이 불공정한 독소조항을 투자 계약에 끼워넣고 있다. 대표적 모태펀드 HB인베스트먼트(HB)가 지난 3월 코리아크래프트비어(KCB)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패소한 이유도 HB 측이 투자 조건으로 내건 ‘특정 시점까지 기업공개를 못 하면 연복리 20%의 손해배상금을 지불한다’는 조항이 독소조항이라고 인정됐기 때문이다.

투자 계약상 독소조항 삽입뿐 아니라 접대 요구 등 다양한 방식의 ‘투자 갑질’이 투자계약 체결 과정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5년차 스타트업 대표 A씨(30)는 “VC가 투자지분 대비 과도한 지분을 요구하거나, 투자 실패의 위험을 회피하고자 지분 투자를 채권 형태로 전환하는 등 독소조항이 관행처럼 굳어졌다”며 “10억원 이상 투자엔 대부분 이러한 독소조항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투자 갑질 유형이 얼마나 적발됐는지, 실제로 개선이 이뤄졌는지는 모태펀드 투자결정권자인 한국벤처투자도 파악하지 않고 있다. 현행 ‘벤처투자촉진법’엔 ‘부당행위’의 정의조차 없어 이러한 갑질을 처벌할 법적 근거도 없다. 이 의원은 “스타트업 성장의 마중물이 돼야 하는 모태펀드가 오히려 독소조항으로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고 있다”며 “제도적 보완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웅희 기자 h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