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지속가능한 고용 확대를 위해서는

입력 2025-10-14 00:38 수정 2025-10-14 00:38
기업들이 순전히 울며 겨자 먹기로 채용 인력을 늘리는 것은 아닐 터다. 다만 한날 8개 그룹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올해만 수만명을 신규 채용한다는 계획을 내놓은 게 자발적 의사로 이뤄진 일은 아닐 것이다.

역시나 지난달 18일 대규모 채용 확대 발표가 있기 사흘 전 대통령실에서 기업 관계자들을 불러 비공개 간담회를 열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간담회 다음 날 이재명 대통령은 “청년 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기업 노력도 필요하다”며 공개적으로 채용 확대를 주문했다.

삼성을 필두로 10대 그룹 중 8곳이 향후 5년간 총 10만명에 달하는 채용 계획을 전격적으로 발표한 건 그 이틀 뒤였다. 이 대통령은 “우리 청년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가 될 것”이라며 그룹 총수들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다.

이로써 청년 취업난을 걱정하는 대통령의 ‘특별 요청’에 공감한 기업들이 적극적인 일자리 창출로 화답하고, 대통령은 이에 사의를 표하며 필요한 지원을 약속하는 전개의 스토리보드가 완성됐다. 대통령실은 내친김에 “30대 기업, 100대 기업까지 채용을 확대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드린다”며 대상을 넓혔다.

이를 민간 기업들에 대한 정치권력의 과도한 압력 행사란 식으로 나쁘게 볼 것만은 아니다. 국정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핵심 과제인 청년 고용 문제 해결을 위해 재계에 협조를 구하는 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다. 역대 정부도 그렇게 했다. 기업들로서도 고용과 투자를 확대해 국가 경제에 기여하는 일은 사회적 책임이기도 하고, 또 인재 확보는 미래를 대비한 투자 성격도 있다.

그럼에도 이번 채용 확대 결정은 마른 수건 쥐어짜기 성격이 짙다. 그만큼 경제 형편이 좋지 않고 사업 환경의 불확실성은 커지고 있다. 관세를 무기화한 미국의 압박은 갈수록 거세지고 주력 수출 상품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중국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상황이다. 석유화학이나 철강 등 업종은 당장 구조조정을 해야 할 판이라 채용 확대 부담도 가중될 수밖에 없다. 한국경제인협회가 지난달 5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진행한 올 하반기 대졸 신규채용 계획 조사에서 응답 기업의 약 63%는 채용 계획이 없거나 미정이라고 답했었다. 채용시장 문이 급격히 닫히자 대통령실이 나서서 임시방편으로 문고리를 잡고 있는 형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정부와 정치권이 응답할 차례다. 경제계는 가뜩이나 대외 환경이 어두운데 기업들 발을 더욱 무겁게 하는 친노조 색채의 법안과 정책들이 현장의 아우성에도 아랑곳없이 관철되고 있다고 토로한다. 노란봉투법 처리, 두 차례에 걸친 상법 개정이 그랬다. 주 4.5일제 도입과 법정 정년연장도 임기 내 완수할 국정과제에 올라 있다. 모두 명분과 이유가 있다 해도 임금 체계 개편, 근로 유연화 등 기반 조성이 선행되지 않으면 결국 경영 환경을 위축시키는 반(反)기업적 조치들이다.

당정이 최근 배임죄 폐지 방침을 밝힌 건 재계의 불만을 달래려는 일종의 당근이다. 경제형벌은 경감하되 금전적 책임성을 강화한다는 방향성에 재계도 환영한다. 다만 이는 사업상 문제가 발생했을 때 경영진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부담은 덜어줄 수 있지만, 제도적으로 이미 힘들어진 경영 환경 자체를 개선하는 조치는 아니다.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는 구조적 리스크는 해소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이 대통령은 “청년, 기업, 국가가 ‘윈윈’ 할 수 있는 성장의 길을 열어가겠다”고 약속했다. 채용 확대가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게 하려면 무엇보다 기울어진 정책에서 발생하는 불확실성을 걷어내고 기업들이 성장 비전을 갖고 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풀어야 한다는 재계의 절박한 호소도 귀담아들어야 한다. 그것이 윈윈으로 가는 첫걸음이다.

지호일 산업1부장 blue5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