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히브리어 수업

입력 2025-10-14 03:17

몇 주 전 가을학기가 시작되면서 카리브해의 미국령 푸에르토리코를 향했다. 수도 산후안에서 동쪽으로 약 20㎞ 떨어진 도시 리오그란데에서 기초 성서 히브리어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학교에서 나는 종종 ‘미국에서 스페인어로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한국인 교수’로 소개되는데 사실 스페인어로 히브리어를 가르칠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가끔 맡는 고급 성서 히브리어 과목은 늘 영어로 진행한다. 스페인어로 마지막 히브리어 강의를 한 것도 10여년 전 일이다. 그런데 이번 학기에 뜻밖에도 푸에르토리코 신입생 스무명이 온라인으로 히브리어를 수강하겠다고 신청했다. 그래서 이번 학기는 내게도 유난히 기대가 컸다.

기초 히브리어를 배우는 학생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낯선 문자를 익히는 것이다. 강의 처음 몇 회차만큼은 온라인보단 직접 대면해 수업하는 게 더 효과적이라 판단해 3박4일 일정으로 푸에르토리코를 방문했다. 컴퓨터와 교재, 단어 카드와 학습지 등 필요한 자료를 가득 담은 가방을 혹시 분실할까 싶어 기내에 직접 들고 탔다. 일전에 수화물이 도착하지 않아 애를 먹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행기는 만석이었고 내 좌석 위 짐칸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결국 가방을 조금 앞쪽 짐칸에 넣을 수밖에 없었다. 비행 내내 그쪽으로 시선이 자꾸 갔다. 히브리어 단어장을 탐낼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공연한 걱정이 내 마음을 붙잡고 있었다.

카리브해에서 가장 붐비는 루이스 무뇨스 마린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안전벨트 사인이 꺼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부터 챙겼다. 그런데 뒤에서 누군가 다급히 밀치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비켜주세요. 머리를 좀 젖혀주세요. 아니, 반대쪽으로요. 짐을 꺼내야 하는 데 걸리네요.” 돌아보니 바로 옆자리에 앉았던 부부였다. 그들도 나처럼 미국 매사추세츠주에서 온 방문객이었다. 그때 앞쪽에서 누군가 나직이 말했다. “트랑킬로(Tranquilo).” 스페인어로 “천천히 해도 괜찮아요”란 말이다. 문득 둘러보니 일어서 있는 사람은 우리 셋뿐이었다. 다른 승객은 모두 여유롭게 앉은 채 자기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사람이 나가면 그제야 일어나 짐을 내리고 천천히 걸어 나가는 모습이었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푸에르토리코 사람의 느긋함이구나 싶었다.

그날 저녁부터 수업이 시작되었다. 매일 저녁 3시간씩, 토요일엔 6시간 수업을 진행해 교재 6과를 마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섬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학생들이 온라인 회의 플랫폼으로 접속해야 하는데 둘째 날 수업에 인터넷이 불안정해 3~5분 간격으로 연결이 끊어졌다. 전날 배운 자음을 복습하고 이제 모음을 익힐 차례였다. 모음 하나 배우면 끊어지고, 다시 접속해 다음 모음을 배우면 또 끊어졌다. 그렇게 20번이 넘게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내 스트레스는 점점 높아만 갔다.

놀랍게도 학생들은 한결같이 태연했다. 인터넷 연결이 되면 동그란 눈으로 집중해 수업을 듣고, 끊어지면 옆 사람과 웃으며 담소를 나눴다. 이런 상황이 열 번 스무 번 벌어져도 상관없었다. 어떤 불평도 찡그리는 표정도 없이 학생들은 3시간을 그렇게 공부했다. 온라인으로 접속한 학생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화면이 켜질 때마다 웃으며 반기는 얼굴이 모니터를 가득 채웠다.

3박4일간 여섯 과를 끝내겠다는 내 계획은 현지 인터넷의 비협조 탓에 수포로 돌아갔으나 학생들은 느긋한 웃음과 담소로 모자람을 대신해줬다. 결국 학습 목표의 절반을 달성했을 뿐이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내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롭고 편안했다. “세 과를 마친 게 어디야!” 정말 그랬다. 그만하면 충분히 감사할 일이었다.

박성현 (미국 고든콘웰신학대학원 구약학 교수·수석부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