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외환위기가 터졌지만 거제는 달랐다. 유가가 치솟자 해양 시추선과 원유 운반선 발주가 급증했다. 유가가 높을수록 산유국의 주머니가 두둑해지고 그 돈이 조선소로 흘러들었다. 거제에서는 “길거리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였다.
아이러니하게도 IMF 이후 달릴 기회는 더 많아졌다. IMF 이전에는 1년에 풀코스를 달릴 기회가 3회 정도였다. 달리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위로가 됐다. 불안과 긴장 속에서 많은 이들이 운동화를 꺼내 신었고 도시 곳곳에서 마라톤 동호회 대회가 개최됐다.
대회를 찾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여행하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나는 오래 달릴수록 경쟁력이 있다는 것을 체득하며 가능한 한 풀코스를 선택했다. 긴 거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희열과 고통, 그리고 완주 후의 평화가 내게는 삶의 기도가 됐다.
대부분 대회가 주일에 열린다는 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처음엔 한두 번 빠졌지만 점점 교회를 비우는 날이 많아졌다. 주일마다 집을 비우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불만도 쌓여 갔다. 혼자 어린 두 아이 손을 잡고 교회에 가는 아내의 길은 녹록하지 않았을 테다.
결국 이혼 이야기가 나왔다. 살기 위해 시작한 달리기가 가정을 흔들 줄은 몰랐다. 그즈음 2001년 베이징 마라톤 대회 참가 기회가 찾아왔다. 다른 대회 우승 부상으로 받은 참가권이었다. 톈안먼 광장을 달릴 수 있는 첫 해외 무대였다. 그러나 베이징 도착 후 통화한 아내는 말했다. “한국에 돌아오면 이혼할 각오를 해.”
출발선에 서자 아내의 불만은 까맣게 잊었다. 베이징 하늘 아래, 톈안먼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함성이 출발선을 흔들었다.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기록은 2시간 32분 55초. 당시로는 나의 역대 최고 기록이었다. 서둘러 귀국했지만 토라진 아내와는 기쁨을 나누지 못했다. 지금도 아내는 말한다. “마라톤만 빼면 당신은 백점짜리 남편이야.”
나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씁쓸하게 웃는다. 내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백점을 받는 마라톤인데 그 마라톤 때문에 아내에게는 백점을 받지 못했다. 아내의 바람은 단순했다. 대회를 줄이고 주일에는 함께 예배드리고 봉사도 계속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성경의 말씀 앞에서 선택의 기로에 섰다. 가르치던 아이들에게 온전한 본이 되지 않아 3년을 섬겼던 고등부 교사를 내려놓았다. 대신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고 얼버무렸다. “내가 달리면 얼마나 달리겠어. 메뚜기도 한철이잖아.” 그런지가 벌써 33년, 장수 메뚜기가 됐다.
세월이 흐르며 아이들도 잘 자라줬고 국가대표로 국위선양도 하게 되니 아내의 마음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나에겐 달리기에 대한 사명감이 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충족시켜드리지 못할지라도 이것이 나의 길이라 생각하며 달려왔다. 달리기를 통해 많은 사람을 만나며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복음 전파에 일익을 감당하고 싶다. ‘심재덕 선수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믿고 싶다’는 사람들의 고백을 보며 옆에서 묵묵히 지켜준 아내의 헌신과 기도에 감사한다. 이제껏 일군 나의 모든 삶은 아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