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국제정치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다고 성토할 정도로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불확실성도 높다. 규칙기반 질서는 위기에 직면해 있고 모든 것이 과거와는 다르다. 미국조차 변하고 있으며, 북한도 예전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대외적 행보가 도드라지고 있다. 이런 변화는 전 세계에 도전이지만 유독 한국은 지정학적 특성상 변화의 태풍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 한국에 이러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기회가 이어지고 있다. ‘외교 모멘트’라는 풍년이 바로 그 기회의 주인공이다. 지난 제80차 유엔총회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이라는 시기와 중첩돼 한국에 ‘외교 보검’을 무장시켜준 세기의 기회였고, 2025년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는 한국을 ‘외교 보검 시즌2’로 무장시켜줄 절호의 외교 무대다.
경주 APEC이 진가를 발휘하는 ‘외교 보검’이 되려면 정례화된 다자무대 행사라는 관성적 인식을 뛰어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플랫폼 주도 외교’라는 새로운 개념적 설계가 필요하다. 경주 APEC이 불확실한 ‘대외적 환경’과 ‘선진강국’이라는 한국의 위상이 만나는 시기적 교차점에서 개최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에 주최국인 한국은 APEC 플랫폼을 역동적으로 활용해 외교적 시너지 창출의 여건과 환경 조성에 나서야 한다. 특히 3가지 외교 잭팟에 주목하며 적극 추진할 필요가 있다.
첫째, 다자외교에서 한국의 비중과 역할을 높이는 외교 잭팟이다. 경주 APEC 정상회의 주제인 ‘지속가능한 내일: 연결, 혁신, 번영’은 ‘고립’이 아닌 ‘협력’이 우리 모두의 미래라는 점을 강조한다. 선진강국이 된 한국은 단지 ‘의지’를 넘어 이러한 환경을 조성해 나갈 ‘역량’도 구비한 국가이기에 주최국으로서 남다른 차별성이 있다. 따라서 아시아·태평양이 직면한 도전에서 한국의 역할을 부각시킴으로써 글로벌 책임강국 외교를 본격화하는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
둘째, 신냉전 기제 완화를 위한 단초 제공이라는 외교 잭팟이다. 미·중 경쟁이 신냉전 고도화의 중심에 있는 상황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모두 경주를 찾는다. 한국이 주최국으로서 강대국 정치의 긴장을 완화하는 플랫폼 주도 외교의 가시성을 높여줄 핵심 기회인 셈이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후 첫 미·중 정상회담이 경주에서 열린다면 귀중한 외교 헤리티지로 기록될 수 있다. 한국은 여기서 그치지 말고 플랫폼 주도 외교를 위해 이와 유사한 외교 플랫폼 성과 활성화에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셋째, 한국의 안보 이익에 직접적으로 중요한 양자외교와 소다자외교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외교 잭팟 측면이다. 관세 협상 후속 조치와 안보 의제 부상 속에서 한·미동맹 결속력 강화를 위해 많은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그런데 대북정책 공조는 한·미동맹의 결속력을 높이는 핵심적 단초라는 점에서 경주 APEC 계기 한·미 정상회담이 ‘업무분장 공식’(피스메이커 미국+페이스메이커 한국)을 구체화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도록 해야 한다. 경주 APEC 정상회의 계기 북·미 정상회동 추진만으로도 업무분장 공식 본격 가동 측면에서 나름의 상징성을 가질 수 있다. 나아가 한·미·일 정상회의도 현실화된다면 대북정책 공조가 한·미 양자와 한·미·일 삼자로 이중적 네트워크화됨으로써 안보 완성도를 높이는 기대효과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2025년 현재 한국은 반만년 역사 속에서 가장 국제적 위상이 높은 시대를 맞이한 상태이고, 바로 이 절정의 시기에 찬란한 역사적 유산을 간직한 경주에서 제32차 APEC 정상회의가 열린다. 역사적 자긍심과 현재의 한국 선진강국 위상이 빚어낼 외교 잭팟에 대한 기대감이 큰 이유다.
반길주
국립외교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