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연례(76·사진) 작가는 서라벌예대(현 중앙대)를 졸업했지만, 결혼과 함께 화가의 꿈을 접었다. 목사 집안의 맏며느리로 살면서 ‘한국 실험미술 거장’으로 불리는 남편 이건용 화가를 내조하고 두 자녀를 키우는 동안 자신만의 시간을 갖기 어려웠다.
2017년, 결혼한 딸이 사는 미국 샌디에이고에 머물던 중 주택가 창밖으로 일렁이는 야자수 나무가 잠자던 예술적 열망을 일깨웠다. 그는 종이에 오일파스텔로 야자수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귀국 후 그해 68세의 나이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후 ‘인생은 70부터’를 증명하듯 부지런히 작품 활동을 이어온 승 작가가 5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10일 서울 강남구 청담보자르갤러리에서 개막한 ‘나무, 바람, 그리고 여백’전은 작가의 노익장을 응원하려는 하객들로 붐볐다.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운 것은 그가 첫 개인전 이래 지속해온 야자수 연작이었다. 승 작가는 주로 종이에 오일파스텔을 사용한다. 오일파스텔을 옆으로 눕히거나 세워서 자유자재로 그린 단색의 선에서 ‘소박한 해방감’이 느껴진다. 오일파스텔은 크레용과 비슷해 주변적 재료로 여겨지지만, 오히려 동양화 같은 선의 맛과 여백의 미를 자아낸다. 최근 신작에서는 드로잉 위에 아크릴 물감을 덧칠해 대상을 추상화하는 실험도 선보였다. 수묵의 번짐이 연상된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승 작가에게 야자수는 일종의 자화상이다. 역경을 견디며 꿋꿋이 생명을 이어가는 존재의 은유다. 그는 “유난히 식물을 좋아한다. 강한 생명력이 느껴져 오래 들여다보곤 한다”면서 “관람객들이 화면 가득 메운 나무와 바람, 여백에서 삶의 본질을 성찰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남편 이 작가는 “기회가 오면 가족 신경 쓰지 말고 전시를 많이 하라”며 응원한다. 승 작가는 내년 양평 안상철미술관, 내후년 서울 조은갤러리 등 줄줄이 개인전이 예정돼 있다.
이번 전시에 앞서 그의 야자수 작품이 문예지 ‘현대문학’ 9월호 표지에 실렸다.(왼쪽) 앞서 2021년 12월호에 남편 이 작가의 작품이 실린 데 이어 부부 작가가 나란히 문학잡지 표지를 장식하는 보기 드문 기록을 남기게 됐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