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민주당 당헌에는 ‘당원 주권주의’와 ‘대중정당 지향’이라는, 때때로 충돌할 수 있는 가치가 함께 담긴 독특한 문구가 있다. 총칙 3조 2항 ‘민주당은 당원을 중심으로 운영하되, 국민의 폭넓은 지지를 기반으로 한다’는 조문이 그것이다. 당원이 주인인 정당을 추구하지만 전체 민심과도 동떨어지지 않도록 균형을 좇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양 노선의 모순적 긴장을 조화시키겠다는 목표를 당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폭넓은 지지는 수권 정당을 꿈꾸는 입장에선 당연한 지향점이다. 그래서 이 조항은 야당일 땐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국민 눈치를 안 살피고선 정권을 탈환할 만한 지지를 얻을 수가 없다. 하지만 여당이 된 지금, 당헌 3조가 제시한 균형의 숙제는 딜레마가 되고 있다. 강성 지지층의 입김이 커진 상황에서 중도와 보수까지 아우르는 행보를 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지지층을 거스르는 소신을 밝히려면 정치생명 정도는 걸어야 할 풍토에서 당헌 3조는 겉치레 조문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추석 연휴 기간 떠들썩했던 대통령실과 민주당의 개혁 온도차 논란은 이런 노선 충돌에서 비롯됐다. 우상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지지층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당과 국민 전체를 상대로 국정을 책임져야 하는 대통령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룰을 정했다”며 ‘뉴노멀 당정 관계’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당은 대통령 의견을 존중하고, 대통령실은 당에서 하는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다”고 말했다. 일종의 역할 분담론이다.
그러나 존중과 무간섭의 원칙은 제법 큰 잡음을 내고 있다. 우 수석은 대통령에게서 “당이 왜 저런 결정을 내렸나”라는 질문을 제일 많이 받는다고 했다. 선뜻 이해되지 않는 당의 행보가 많았다는 토로다. 강훈식 대통령비서실장은 “마취 후 일어났는데 혹을 뗐다는 걸 알게 되는 개혁”이라는 비유로, 조용하고 저항을 줄이는 개혁을 강조했다. 민주당이 조희대 대법원장을 거칠게 흔드는 방식으로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데 대한 우려를 직설적으로 드러낸 셈이다.
반면 당은 조 대법원장 등을 “개혁에 저항하는 반동의 실체들”로 규정하며 정면 대응을 이어갈 태세다.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민주당은 전직 대통령 탄핵으로 출범한 정부를 뒷받침하는 여당이고, ‘개혁’에 더해 ‘청산’이라는 엄중한 임무까지 부여받았다”며 조용한 설거지 불가론을 말했다. 뉴노멀 당정 관계가 현실 정치에서 혼선으로 구현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범여권 의석만 188석인 상황에서 입법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만 그것이 곧 국민적 동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10월 첫주 전국지표조사(NBS)에서 조 대법원장의 국회 청문회 출석 요구에 대해 ‘과했다’와 ‘필요하다’는 응답이 팽팽했다. 사법개혁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민주당 방식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입법만 마무리하면 개혁이 완성된다고 여기는 것도 착각일 수 있다. 두터운 지지 없이 심은 개혁의 나무는 뿌리를 깊이 내릴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당은 당헌 3조의 의미를 되새기길 바란다. 이 조문이 살아 있는 원칙으로 작동하려면 당원과 국민 모두를 설득해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정교한 정치 기술이 뒷받침돼야 한다. 지지층의 요구만으로 당의 방향이 결정되는 구조가 계속된다면 이 조항은 선언적 구호에만 그치게 된다. 지금 여권은 온도차 없이 개혁을 성공시킬 품격 있는 설득의 기술이 필요하다.
전웅빈 정치부 차장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