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코끼리 작게 만들기

입력 2025-10-13 00:32

긴 연휴가 즐겁기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의 부담이 되는 일이 있어 평온하지 못했다. 마음이 분주했다. 분주한 마음은 곧잘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바뀌곤 한다. 그러면 부담이 눈덩이처럼 커져 거대한 코끼리가 되기도 한다. 한 번 커진 코끼리는 쉽게 작아지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의 문제가 몸의 문제가 됐다. 급체를 한 것이다. 마음이 과부하 되면 몸은 이런 방식으로 알려주곤 한다.

연휴라 병원 연 곳이 없었다. 약국에서 약을 사 먹고 밖을 좀 걸었다. 걸을 땐 괜찮은 것 같다가도 멈추면 두통과 울렁거림이 이어졌다. 집에서도 서성였다. 누우면 울렁거림을 참을 수 없어 앉아 잤다. 잠이 계속 쏟아졌다. 이런 몸 상태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니, 우선 회복하자고 생각했다. 아침에 일어나 흰죽을 끓이려다 삶은 고구마 한 개가 있길래 고구마죽을 만들기로 했다. 고구마는 쉽게 으깨졌다. 양파를 다져 넣고 우유를 부었다. 소금을 약간 넣고 약불에 한참을 저었다. 고구마 덩어리가 풀어지더니 아주 고운 죽처럼 변했다. 한입 먹어보니 부드러웠다.

소화를 시킨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소화할 수 있도록 다룬다는 건 이런 것이구나. 문득 내가 소화시키지 못한 일들이 떠올랐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싶어 덮어 뒀던 일들도, 감당하기 힘들어서 모른 척했던 일들도. 어떤 마음을, 상처를, 고통을 감당하려면 그만큼 내면을 다뤄보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겠다. 고구마를 잘게 으깨고 천천히 저어가며 끓이듯 계속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걸. 부드럽고 작게 만들어봐야 한다는 걸.

냉장고 깊숙이 넣어 둔 야채는 저절로 소화되지 않는다. 꺼내보면 조금 썩거나 곰팡이가 생겼어도 형체는 그대로다. 오히려 만지고 싶지 않게 변했을 뿐이다. 그러니 우선 조금씩 꺼내 보기로 한다.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두고, 작게 만들어보는 시간. 이 시간이 어려운 마음을 소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힘이 되어준다는 것을 믿어보기로 한다.

안미옥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