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방·여성쉼터… ‘돌봄의 둥지’ 만들어 연약한 이들을 품다

입력 2025-10-13 03:20
김명희 목사가 최근 서울 마포구 나눔공부방에서 공부방과 탁아방을 운영하며 아동과 여성 인권 보호를 위해 힘써왔던 일들을 소개하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지하철 6호선 대흥역을 나와 오르막길을 5분쯤 오르니 6층짜리 상가건물에 ‘지역아동센터 나눔공부방’이라고 적힌 간판이 붙어 있었다. 2층에 오르자 200㎜ 크기의 실내화가 바닥에 빽빽해 발 디딜 틈도 없었다. 1987년 문을 연 나눔공부방은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지역아동센터이다.

최근 이곳에서 센터장 김명희(68) 목사를 만났다. 김 목사는 38년째 나눔공부방 원장이자 나눔교회 목사로 섬기고 있다. 서울 마포구 아현동 산동네에서 30년간 지내다 8년 전 이곳으로 터를 옮겼다. 이전하기 전에는 공부방 이름을 딴 ‘나눔길’이 주민 투표를 거쳐 도로명으로 채택될 만큼 동네에서 사랑을 받았다.

현재 40여명의 초·중·고등학생이 이 공부방을 다닌다. 이용 아동의 90% 이상이 맞벌이 또는 한부모 가정 출신이다. 주 5일 이상, 하루 4시간 이상 센터를 이용하는 아이들이 절반을 넘는다. 부모님이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돌아오는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 이곳은 놀이터이며 학원이자 가정이다. 학기 중에는 저녁을, 방학 중에는 점심과 저녁 식사를 제공한다. 김 목사는 “급식 지원을 이용하는 아이들은 이곳 무료 급식이 없으면 하루 한 끼 이상을 굶게 된다”고 말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부방’. 그가 나눔공부방을 연 배경에는 그 자신이 가난의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있었다. “가난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모든 기회로부터 차단당하는 것입니다.” 김 목사는 자신을 아현동 달동네에서 자란 가난한 소녀였다고 소개했다. 그는 “가난이란 것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가난은 차별과 소외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김 목사가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가 사명을 깨닫는 데 결정적 계기가 됐다. “왜 나를 목회자로 부르셨을까, 왜 어려운 가정에서 자라게 하셨을까.” 자문하던 그는 결국 답을 찾았다.

그는 “교회를 개척하면서 교회는 사람이고 공동체가 돼야 함을 알게 됐다”며 “연약한 자들과 함께 지내며 이들을 살리는 게 하나님의 뜻이었다”고 고백했다.

나눔교회 개척과 함께 나눔공부방을 개소한 김 목사는 그 이듬해 소망탁아방을 열었다. 어머니에게 폭력을 일삼던 아버지, 이웃집에 사는 성매매 여성 등 그의 어린 시절 기억은 여성과 아동 인권을 지키는 강한 동기가 됐다. 소망탁아방에 오는 아동의 나이는 3개월부터 7세까지다. 영아와 유아가 많다 보니 이곳은 보호자인 젊은 여성까지 함께 품는 모성 보호 기능을 갖춘 공간으로 발전했다. 여성 쉼터, 성폭력 상담센터 등도 함께 만들어졌다.

대흥동으로 옮긴 뒤 탁아방은 잠시 문을 닫았지만 2016년까지의 이곳을 거쳐 간 연인원은 11만명을 넘는다. 김 목사는 “어려운 가정일수록 여성들이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이 보였다”며 “엄마가 보호받고 존중받아야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가정이 회복된다”고 말했다.

김 목사가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또 다른 이유는 가부장적인 구조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마주한 현실은 더 높은 유리천장이었다. “목회를 시작하고 지금까지 미용실에 간 게 딱 세 번이에요. 머리카락도 집에서 혼자 자르고 외모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있어요.”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틀어 올리는 머리 모양은 차별과 편견에 맞서겠다는 그의 결심을 상징한다.

그는 “대형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지만, 주변의 무시는 사라지지 않았다”며 “당시는 결혼한 여성이 목사 안수를 받기 어려웠던 시절이었다”고 얘기했다. 그가 속한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성 목회자의 숫자는 1980년대 100여명이 되지 않았다. 김 목사는 “기본적으로 ‘여성’이라서 안 된다는 편견과 의식을 깨는 게 가장 어려웠다”고 밝혔다.

김 목사는 “신학을 한 이유는 가난한 과부와 고아를 찾아 품으셨던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였다”며 “예수님을 닮아야 할 교회에서 타당하지 못한 이유로 차별을 한다는 사실에 분노했다”고 말했다. 기독교대한감리회에는 1989년까지 ‘결혼한 여성은 교회를 담임할 수 없다’는 차별 조항이 존재했다. 여성 운동에 앞장섰던 김 목사는 미운털이 박혀 법 개정 이후에도 6년간 목사가 되지 못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15년이 지나서야 그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 목사는 2023년부터 올해까지 기독교대한감리회 전국여교역자회 회장을 맡아 여교역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활동했다. 그는 “회장을 맡아 활동을 하며 통계를 내보니 여성 목사의 수가 10배가 늘어난 1000명이 됐다”고 돌아봤다.

여성 목사가 흔치 않았던 시기에도 김 목사는 “목회자의 진로를 선택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했다. 그는 “가난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사회의 부당한 구조를 마주하고 가난으로 인해 한 가정이 어떻게 해체되는지 겪었다”며 “이러한 경험을 통해 나와 비슷한 소외와 차별을 경험한 이들을 품도록 부르셨다”고 말했다.

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