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달러 환율이 1400원대로 오른 가운데 미국 주식과 금, 비트코인 등 자산 가격은 사상 최고치로 치솟아 원화만 보유하고 있다면 상대적으로 가난해지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원화 자산에 변동이 없어도 실질 구매력은 하락하기 때문이다. 국내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돈이 녹는 기분’이라는 불안감과 함께 달러와 미국 주식, 금 등을 공격적으로 사들이는 ‘포모’(FOMO·상승장 소외 공포)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9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하반기 원·달러 환율(주간 거래 종가 기준)은 3.70% 상승했다. 이는 달러 대비 원화의 가치가 3.70% 하락했다는 뜻이다. 서울외국환중개에 따르면 추석 연휴로 외환시장 휴장 전 마지막 거래일인 지난 2일 오전 2시 야간 거래에서 원·달러 환율은 전 거래일 종가 대비 3.80원 오른 1407.00원에 거래를 마쳤다. 원·달러 환율은 야간장 종가 기준으로 7거래일 연속 1400원대를 이어가고 있다.
원화는 전 세계 통화 중에서 유독 낙폭이 크다. 지난달 주요 6개국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나타내는 달러인덱스는 0.43% 올랐다. 통상 달러가 오른 만큼만 약세를 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같은 기간 원화 가치는 달러 대비 1.58% 절하됐다. 원화 가치가 낮아진 만큼 해외여행이나 수입 제품 구입 등에 불리해지면서 원화의 실질 구매력은 떨어졌다.
반면 국제 금값과 미국 증시, 비트코인 가격은 치솟으면서 국내 투자자의 포모 심리를 자극하고 있다. 월급에서 생활비를 제외한 여윳돈을 달러 자산으로 바꾸거나 비트코인 등에 투자하는 움직임이 직장인들 사이에서 확산하는 분위기다. 최재원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현 상황에 대해 “완전히 ‘리스크 온’(Risk On·위험자산 선호심리) 상황으로 모든 위험자산에 돈이 몰리고 있다”며 “이 경우 금값은 내려가야 하지만 ‘디베이스먼트 트레이드’(debasement trade·화폐 가치 저하에 대비한 투자 전략)로 금값도 상승 중”이라고 설명했다.
원화 대비 강세지만 달러의 신뢰도도 높지 않다. 최근 미 연방정부의 셧다운(일시정지) 사태 등이 달러의 신뢰를 낮추고 실물자산인 금을 선호하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8일(현지시간) 뉴욕상업거래소에서 12월 인도분 금 선물 가격은 온스당 4070.5달러로 전 거래일보다 1.7% 올라 종가 기준 역사상 최고 기록을 세웠다. 국제 금값은 올해에만 54% 넘게 상승했다. 주요국 중앙은행의 금 매수도 금값을 끌어올리고 있다.
인공지능(AI) 기술 붐의 붕괴 우려가 금값 상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글로벌 투자은행(IB) 맥쿼리는 “금값 상승은 미국의 AI 기반 기술 붐이 고생산성과 고성장이라는 약속을 실현하지 못하거나 그러한 약속을 뒷받침하는 데 필요한 막대한 투자를 정당화하지 못할 가능성에 대한 집단적 ‘헤지’(hedge·위험 회피)”라고 분석했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올해 금값이 온스당 5000달러에도 근접할 수 있다는 전망을 내놨다.
한국거래소가 운영하는 금 거래 시장인 'KRX 금시장'에서는 국제 금값보다 비싸게 금이 거래되고 있다. 단기에 개인투자자의 투자 수요가 몰리면서 프리미엄이 붙은 것이다. 지난 2일 KRX 금시장에서 금 1g 가격은 18만7300원으로 같은 날 국제 시세(17만4280원)보다 7.47% 높게 거래됐다. 한국거래소는 이례적으로 투자 유의를 당부하는 별도 자료를 배포했다.
비트코인도 사상 최고치다. 9일 오전 3시 미 암호화폐거래소 코인베이스에서 비트코인은 24시간 전보다 2.60% 오른 12만4241달러(약 1억7640만원)에 거래됐다. 뉴욕증시도 AI 거품 우려에도 불구하고 상승세다. 8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지수는 전 거래일보다 0.58% 오른 6753.72에, 나스닥지수는 1.12% 오른 2만3043.38에 각각 마감했다. 역시 모두 사상 최고치다.
금리 인하 등 통화 완화 정책이 펼쳐질 것으로 예상되며 전 세계적으로 위험자산 선호심리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8일 공개한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 따르면 대다수 연준 위원이 연내 추가 금리 인하 가능성에 무게를 실은 것으로 나타났다.
발 빠른 국내 투자자들은 미국 주식을 공격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7일 기준 국내 투자자가 보유 중인 미국 주식 규모는 228조4844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달 들어서만 7조원 넘게 늘었다. 최근 한 달 개인투자자가 가장 많이 순매수한 종목은 클라우드 인프라 업체 오라클로 집계됐다. 이 기간 4111억원 규모를 순매수했다. 뒤이어 아이리스 에너지(3878억원) 비트마인(3736억원) 아마존(2635억원) 팔란티어(2544억원) 등 AI와 스테이블코인 관련주를 사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광수 기자 g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