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35년 차 배우 이병헌(55)에게 또 한 번의 전성기가 찾아왔다.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 어렵지만 이번에는 범위가 ‘글로벌’이라는 점에서 각별하다. 그의 인스타그램만 봐도 인기를 실감할 수 있다. 게시물에 댓글을 다는 대다수가 해외 팬이다. 한국 관객에겐 익숙한 그의 연기력을, 해외에선 이제야 발견하고 매료된 게 아닐지.
올해 그의 활약은 눈부시다. 넷플릭스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와 시리즈 ‘오징어 게임’ 모두에 그가 있었다. ‘케데헌’에서는 악의 우두머리 귀마 역 목소리 연기를 영어와 한국어로 모두 소화했고, ‘오징어 게임’에서는 프론트맨 역으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세계적 거장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로 베네치아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고, 토론토영화제 특별공로상도 받았다.
‘공동경비구역 JSA’(2000) ‘쓰리, 몬스터’(2004)에 이어 세 번째로 작품을 함께한 박 감독은 이병헌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일상에서 그는 장난기 많은 개구쟁이다. 어떻게 이렇게 위대한 연기자가 됐는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의 연기에서 드러나는 비범성은 인간의 평범성에 대한 깊은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보다 겸손하고 소박한 그이기에 가능한 통찰력이 작품 속 캐릭터에 고유한 풍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이것을 ‘비범한 평범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박 감독이 말한 이병헌의 비범한 평범성은 ‘어쩔수가없다’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극 중 25년간 헌신한 제지 회사에서 해고당한 중년 가장 만수 역을 맡은 그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인 인물을 우스우면서도 처절하게 표현해 내며 현실감을 불어 넣었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병헌은 “평범한 인물이 극단적 결정을 내리고 그걸 실행해 가면서 겪는 감정과 행동의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는 것이 촬영 내내 큰 숙제였다”고 말했다.
박 감독에게 ‘어쩔수가없다’ 제작 계획을 처음 들은 건 15년 전쯤이었다. 당시 구상은 원작 소설을 미국 영화로 만드는 거였는데, 한국 작품으로 계획이 바뀌며 이병헌이 주인공을 맡게 됐다. 이병헌은 “운명 같았다”고 돌이켰다. 이 작품은 그야말로 그가 ‘다 하는’ 영화다. 웃기고 울리는 그의 원맨쇼로 한 편의 블랙코미디가 완성된다. 이병헌은 “만수의 희로애락을 따라가는 영화이다 보니 배우인 나의 모든 얼굴이 담겨 있다”며 “내 연기를 좋아하는 영화 팬이라면 분명 좋아할 것”이라고 했다.
다만 의도적으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지양했다. 이병헌은 “처절한 몸부림인데 타인이 봤을 때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정도로 표현했다. 그 선을 지켜야 했다”며 “코미디를 보여주려고 하는 순간, 관객이 인물에게 갖는 동정과 연민은 사라질 거로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인공지능(AI) 등 기술 발전의 여파로 노동자가 소외되는 주제와 관련해선 위기에 처한 극장 산업을 떠올렸다. 그는 “컴퓨터에 밀려 쓰임을 잃은 종이와 극장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안타까워했다.
앞서 박 감독은 베네치아영화제에서 이병헌이 남우주연상을 받길 바랐다고 했지만 수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병헌은 “나는 꿈도 안 꿨는데, 괜히 내 핑계를 대신 거 아니냐”며 웃어 보였다. 수상 기대는 내년 미국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으로 이어진다. ‘어쩔수가없다’는 한국 대표 작품으로 출품됐다. 이병헌은 “후보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영광일 거 같다. 만약 기회가 온다면 쌍코피 터질 각오로 오스카 레이스에 열심히 임하겠다”며 웃었다.
올해 눈부신 성과에 대해선 “운이 따랐다”고 겸손했다. 그는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엄청난 사랑을 받고 ‘케데헌’이 넷플릭스 역대 기록을 다 깰 정도로 돌풍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느냐”며 “순간의 선택과 운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했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일’들을 묵묵히 해 왔을 뿐이라는 말로 들린다. 이병헌은 “만약 영화 속 만수처럼 내가 연기를 못하게 된다면,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을 거 같다”고 말했다.
1991년 KBS 공채로 데뷔한 이병헌은 이듬해 청춘물 ‘내일은 사랑’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활약했다. 이른바 ‘연기 잘한다’는 배우들 가운데서도 그가 독보적인 이유는 모든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소화한다는 점 때문이다. ‘아름다운 날들’(SBS·2001) ‘올인’(SBS·2003) ‘미스터 션샤인’(tvN·2018) 등 드라마가 로맨스 위주였다면 영화에서는 한층 더 다양한 스펙트럼을 선보였다. 누아르 ‘달콤한 인생(2005)’, 액션 서부극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사극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범죄 스릴러 ‘내부자들’(2015), 정치 시대극 ‘남산의 부장들’(2020)까지, 장르를 불문하고 한계 없는 연기력을 입증하며 독보적 입지를 다졌다.
배우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그는 결코 자만하거나 안주하지 않는다. 이병헌은 최근 tvN 예능 프로그램 ‘유 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해 “연기에 대한 부담감과 긴장감이 제 삶에 늘 잔잔하게 깔려 있다”고 고백했다. 그는 “배우가 하는 일은 어떤 기술을 익혀 능숙해지는 게 아니다. 남의 삶을 잠깐 사는 것이니 연습할 수도 없다”며 “새 작품을 앞두고 ‘연기를 어떻게 하는 거였지’ 완전히 막막해지는 백지상태가 되는 순간이 있다”고 털어놨다.
과거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만났을 때도 이병헌은 연기의 어려움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그는 “한 사람이 기쁨, 슬픔, 분노 등의 몇 가지 감정을 새롭게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많은 작품을 한 배우라면 더욱 그렇다”면서 “작품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몸에 익숙해진 것을 그냥 한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타성에 젖는 거다. 그럴 때마다 몸을 한번 털어버리고 리프레시한다. 습관적으로 연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병헌에게는 여전히 소년다움이 묻어난다. 깊고 투명한 눈빛과 맑은 미소, 순간순간 빛나는 유머 감각 등이 그렇다. 이런 순수함은 곧 그의 연기 원천이다. 이병헌은 “순수함을 유지하는 건 모두에게 중요하다. 어른과 아이의 구분은 우리가 만들어낸 경계일 뿐이잖나. 철들기를 강요받는 것은 마치 가지가 잘려나가는 느낌”이라며 “외부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다”고 했다.
미국 할리우드 등 해외 무대를 꿈꾸는 후배들에 대한 조언을 청했을 때도 그는 ‘자유로움’을 언급했다. 이병헌은 “배우는 자유로워야 한다. 여러 외부요인이 생각을 옥죄고 움츠러들게 만들더라도 그걸 뛰어넘으라. 그리고 자유로운 공상과 엉뚱한 생각을 하라”면서 “훌륭한 예술가들을 만나보면 그 안에 어린아이가 있더라. 꼬마의 마음을 찾으려 애써라. 나 역시 노력하고 있다”고 전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