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적대적 공생관계

입력 2025-10-10 00:32

‘적대적 공생관계’,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를 규정하는 가장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한다. 서로를 적대시하면서, 그 적대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상호 의존적 대립 관계를 말한다. 상대에 대한 혐오가 곧 나의 정체성이 되고, 우리 편을 결집하는 동력이 된다.

선거철만 되면 진영 대결이 일어나는데, “어떻게 하면 잘살 수 있을까?” 하는 정책 논의는 사라지고, 누가 우리 편인가가 선택의 기준이 된다. 민주주의의 꽃이라 불리는 선거가 일 잘할 사람을 뽑는 절차가 아니라 혐오하는 상대를 응징하는 의식(儀式)이 되어버렸다. 언론 또한 적대적 공생관계의 한 축을 담당한다. 대안언론이라 할 수 있는 유튜브는 물론이고, 레거시 미디어 역시 진영 싸움을 확대 재생산함으로써 청취율과 구독률을 보장받는다. 국민도 더 이상 적대적 공생관계의 희생자가 아니다. 적극적으로 이 싸움의 선수가 돼 댓글을 달고, 집회에 참여한다.

적대적 공생관계는 국내 정치에서만 작동하지 않는다. 냉전기 미국과 소련은 서로를 ‘악’으로 규정하며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한 전형적인 적대적 공생관계였다. 미국은 소련을 “전체주의의 위협”, 소련은 미국을 “제국주의적 침략자”로 규정했다. 위험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핵무기 경쟁을 위한 군비를 확장했고, 두 체제 모두 군산복합체와 정치권력 구조를 유지하는 동력을 얻었다. 오늘날 미국과 중국의 관계 또한 서로 비난하고 견제하면서도 동시에 상호 의존 속에 유지되는 적대적 공생체제의 전형이다.

1972년은 한반도 분단 이후 남북이 동시에 새로운 헌법을 제정한 해였다. 박정희 정권은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장기 집권을 가능하게 한 ‘유신헌법’을 제정했다. 이어 김일성도 남한의 군사독재와 부르주아적 타락을 내세워 국가 최고지도자의 절대권을 명문화한 속칭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했다. 두 체제는 서로를 ‘악’으로 규정했지만 실상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자신을 정당화하고 내부 결속을 강화한 거울 같은 관계였다.

적대적 공생관계 사회의 폐해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집권당이건 야당이건 상대가 하는 일을 깎아내리기만 하니 긍정적인 정책이 나오기 어렵다. 상대와 타협점을 찾으려 하면 금세 ‘배신자’ 낙인이 찍히고, 타협과 숙의의 영역은 사라진다. 합리적인 공론장은 무너지고 신뢰의 기반이 붕괴하여 결국 공동체가 해체될 수밖에 없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다 죽는단 말이야!” 공멸을 두려워하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의 유명한 대사가 우리 현실이고 미래다.

그렇다면 적대적 공생관계를 끝내고 상생의 길로 갈 수는 없을까. 여기저기서 상생을 외치고, 다양한 방안이 제시되지만 그 길은 멀고도 험하다. 적대적 공생관계의 뿌리에 인간의 본능적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자기의(義)’의 욕망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라는 자기중심성에 빠진 존재다.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기를 지독히 싫어하는 존재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우면 자신이 순수하고 의롭다는 착각 속에서 안도감을 얻는다. 개인이 아닌 집단이 함께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느끼면 그 쾌감은 극에 달한다. 결국 우리 사회의 문제는 정치적이기 이전에 신학적 문제인 것이다.

“나도 죄인이다.” 기독교 가르침의 핵심이고, 이 깨달음으로부터 모든 사회 문제 해결이 시작된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게 아니라 내 안에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세상의 죄악과 나의 죄가 서로 얽혀 있음을 깨닫고, 세상의 문제에 대해 책임지는 데서 비로소 나와 세상의 구원이 시작된다.

장동민 백석대 기독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