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버지니아주 콴티코 해병대 기지에 전군 지휘관 수백명을 소집해 개최한 회의에서 “미국은 내부로부터 침략당하고 있다. 미군의 첫 번째 임무는 본토 수호이고 이는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워싱턴DC와 로스앤젤레스(LA)에 주방위군을 투입해 범죄율을 줄였다. 이런 위험한 도시들을 군과 주방위군의 (전쟁) 훈련 기지로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곧 시카고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그동안 수많은 국제 분쟁에 관여해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해 왔던 미군에게 “이제 우선순위는 그런 게 아니라 내부의 적을 몰아내야 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트럼프가 겨냥한 곳들은 압도적인 ‘민주당 대도시’들로, 1791년 발효된 수정 연방헌법 제1조를 통해 미국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해온 진보주의에 대한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수정헌법 1조(The First Amendment)는 특정 종교를 국교로 정하거나(국교 금지 조항)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방해하거나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평화로운 집회의 자유, 정부에 대한 탄원 권리를 금지하는 어떠한 법률도 제정할 수 없도록 한 것이다. 230년 넘게 지속돼온 수정헌법 1조는 미국을 세상에서 가장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고 전 세계 민주주의의 기준점이 되게 해준 근간인 셈이다.
미국판 계엄령… 시위대에 총격
지난 5일 크리스티 놈 국토안보장관은 이민 단속 관련 시위와 주방위군 배치 등으로 위기감이 고조되는 시카고를 ‘전쟁터’라고 지칭했다. 놈 장관은 “브랜든 존슨 시카고 시장의 도시는 전쟁터다. 그는 범죄자들이 사람들의 삶을 망치도록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주방위군 배치를 두고 존슨 시장이 “정신 나간 일”이라고 비판한 데 대한 맞대응이었다. 시카고가 속한 일리노이주의 J B 프리츠커 주지사도 “(주방위군 투입은) 완전히 터무니없고 비미국적”이라고 비난했다.
전날 시카고에선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이 단속 반대 시위자에게 총을 쏴 부상을 입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프리츠커 주지사가 “여기를 전쟁터로 만든 건 바로 그들(연방정부)”이라고 하자 트럼프는 8일 반란법까지 거론하며 주방위군뿐 아니라 연방군까지 투입하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지난달 28일에는 트럼프가 또 다른 민주당 도시인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주방위군을 투입하려 하자 이를 불허하는 법원의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연방정부는 합법적 신분인 이민자들까지 마구잡이로 체포해 인권단체들로부터 집단 소송에 직면한 상태다. 주요 언론들도 무리한 이민 단속이 미국 사회 전체를 경색시킨다며 대체로 비판적인 입장이다.
대학들 보조금 끊고 집회 금지
트럼프는 최근 행정명령 서명식에서 “하버드대와 잠정 합의에 도달했다”며 5억 달러를 투자해 하버드대에 인공지능(AI) 관련 기술을 가르치는 방안을 포함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지난 5월 하버드대의 반유대주의 시위 대응 등을 문제 삼아 연방 보조금을 전면 중단했던 조치가 해제될 수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미국 지식인 사회에선 “최고 대학인 하버드마저 트럼프 행정부의 길들이기 조치에 수정헌법 1조 언론·집회 등의 자유를 포기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트럼프 행정부가 연방 보조금을 쥐고 압박했을 때 앨런 가버 총장이 “우리 대학은 수정헌법 1조의 가치를 행정부의 돈과 바꾸지 않겠다”며 저항 의지를 다졌던 하버드대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는 비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지난 2월 초 컬럼비아대에 대규모 경찰력을 보내 반유대주의 시위를 진압했고 이 대학의 연방 보조금을 끊어 버렸다. 그러면서 “모든 사립대학들이 이런 행동을 용납해온 관행을 뿌리 뽑겠다”며 명문대학들을 향해 사찰의 칼을 들었다.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하버드대는 물론 다른 아이비리그 대학들도 서둘러 정부와 합의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브라운대는 연방 보조금을 받는 조건으로 향후 10년간 지역 인력개발 프로그램에 50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했고, 컬럼비아대는 교육부가 제기한 반유대주의 방치 혐의와 관련해 3년간 벌금 2억 달러를 내기로 했다.
토크쇼·코미디까지 검열 칼날
최고 시청률을 기록해온 ABC방송의 심야 토크쇼 ‘지미 키멀 라이브’는 지난달 15일 진행자 키멀이 청년 보수운동가 찰리 커크 피살 사건 관련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방송이 중단됐다. 키멀이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패거리가 (커크 죽음으로)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말했다가 철퇴를 맞은 것이다. 프로그램이 중단되자 미국 전역의 시청자들이 반발했고 일주일 만에 방송이 재개됐다. 거센 역풍에 ABC 모회사인 월트디즈니컴퍼니가 꼬리를 내린 것이다.
이 사태는 트럼프 행정부가 이민 문제, 대학의 학문 자유를 넘어 시민사회 발언에까지 재갈을 물리려 한다는 우려를 폭발시켰다. 뉴욕타임스는 “현직 대통령에게도 우스꽝스러운 별명을 붙이고 유머러스하게 비난을 가하던 미국 코미디의 전통은 수정헌법 1조의 표창과도 같았다”며 “이런 전통이 트럼프에 의해 말살될지도 모른다”고 지적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