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이 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일을 두 배로 할 수 있을 텐데. 혼자서는 도저히 처리할 수 없는 일거리가 생겨 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비슷한 분야에서 일하는지라 어렵지 않게 도와줄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언니에게 말했다. 어쩌고저쩌고한 일을 하루에 하나씩 해주면 된다. 총 스무 건이다.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겠다. 그러자 언니가 달력을 살펴보며 대답했다. “흠, 주말 빼면 딱 한 달 걸리겠네.” 언니의 말을 들은 내 동공이 심히 요동쳤다. 나는 딱 20일이 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7일을 일하다 보니 사람이 주말에 쉰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 들어오는 일을 마다하지 않다 보니 그리되었다.
주말 없이 일하는 생활의 장점은 월요병이 없다는 것이고, 단점은 골병이 든다는 것이다. 골병을 예방하기 위해 한 달에 두어 번쯤 친구를 만나 한숨 돌리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마저도 시간을 내기 어려워 친구가 퇴근할 때 집까지 태워다주며 짧은 드라이브를 즐긴다. 참, 남자친구가 있을 때는 주말에 이따금 쉬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짠돌이인 걸로도 모자라 양다리를 걸치기까지 해서 이별을 고했고, 그 즉시 주 7일 근무제에 다시 돌입했다. 하늘이 나에게 최악의 남자를 보내준 이유는 내가 이번 생에서 해야 할 것이 결혼이 아닌 일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이러나저러나 나는 일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보니 여러 회사에서 일이 들어온다. 직장 생활을 할 때처럼 대놓고 나무라는 상사는 없지만 정중한 말투로 속을 긁는 사람은 부지기수다. “이번 주 안에 회신드리겠습니다”라고 해놓고서는 영영 연락이 없는 사람, “바쁘시겠지만 금주 수요일까지는 작업물을 보내주셔야 마감에 지장이 없거든요”라고 해놓고서는 수요일에 휴가를 떠나 버린 사람, “이 부분을 이렇게 수정해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말에 이렇게 고쳐줬더니 “아무래도 저렇게 하는 게 낫겠네요!” 하며 말 바꾸는 사람 등등. 이런 사람들에게 차마 화를 낼 수 없으니 나 역시 정중한 말투로 응한다. 그러나 그 말의 속뜻은 한결같다. 짜증 나네, 진짜!
물론, 정반대인 곳도 있다. 이메일을 보내면 재깍 회신해주고, 항상 좋은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며, 일정을 무리하게 잡지 않으면서도 함부로 당기거나 미루지 않는 데다가, 성과까지 좋아서 나에게 꾸준한 수입을 안겨주는 그 회사를 나는 참 좋아한다. 그곳과 연락할 때는 “네” 해도 될 것을 “넹” 하게 되고 “감사합니다” 하면 그만일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용” 하게 된다. 일하면서 인연을 맺게 된 사람과는 업무 외적으로 연결되고 싶지 않아서 SNS를 보지도 않는데 이곳 대표님은 예외다. 점심으로 무얼 드셨는지, 휴가는 어디로 떠나셨는지, 요즘에는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알고 싶어 그분의 SNS를 수시로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 대표님 SNS에 채용 공고가 올라왔다. 대표님은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말씀하셨다. 당신 회사 최고 복지는 일 잘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리하여 많은 점을 배울 수 있다고 말이다. 안마의자도 아니고, 식대 제공도 아니고, 일 잘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는 점을 복지로 꼽다니. 실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대표님의 자신감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었다. 그래, 다른 회사가 일을 못하는 게 아니야. 이 회사가 지나치게 잘하는 거야. 일이란 원래 꼬이고, 답답하고, 서로서로 지지고 볶기 마련인데 이 회사가 기적적으로 잘해냈던 거야. 보통의 사람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는 내가 옳지 않았던 거야.
“이 부분에 이러저러한 요소를 추가하면 더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열받게 하는 이메일이 왔다. “아니, 마무리 단계에서 이러시면 어떡해요. 그렇게 하면 좋은 거 누가 몰라요? 저도 일정이란 게 있잖아요, 일정이!” 하는 말로 확 들이받고 싶지만 억지 미소를 지어 본다. 그래, 여기가 일을 못하는 게 아니야. 거기가 지나치게 잘하는 거지. 이런 식으로 마음을 다스리니 세상만사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다. 우리 언니가 쉴 거 다 쉬면서 일하는 게 아니라 내가 안 쉬는 거야. 헤어진 남자친구가 문란한 게 아니라 다른 남자들이 조신한 거야. 내가 결혼을 못 한 게 아니라 남들이 다 결혼한 것뿐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