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박에서 냉난방 보온 작업을 할 때는 늘 마스크를 써야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코로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쌕쌕거리는 소리가 났고, 입을 크게 벌려 억지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결국 병원을 찾았다. 진단명은 ‘기관지확장증’. 넓어진 기관지 때문에 숨이 원활하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일부를 절제하는 수술이 방법일 수 있지만, 완치를 장담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의사의 말은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약봉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나에게 생명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때가 되면 취하실 이도 하나님이시지만 왜 이런 시련을 주시는지 원망도 많이 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때는 희망보다는 비관과 절망이 내 안에 더 많았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편하게 숨이라도 쉬어보다 죽자.” 몸에 칼을 대는 수술 대신 나는 달리기를 택했다. 주변 반응은 싸늘했다. “숨쉬기도 힘든데 달리기라니, 그러다 진짜 죽는다”는 걱정 섞인 만류가 쏟아졌다.
1993년 스물다섯 살의 새해. 나의 달리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호흡은 불편했지만 팔, 다리는 건강했다. 군에서 단련된 습관 덕에 새벽마다 거뜬히 일어날 수 있었다. 출근 전 옥포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걷고 뛰기를 반복했다. 땀으로 젖어 돌아와 샤워할 때 느끼는 상쾌함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외부에서 용돈 벌이로 의뢰받던 건축 공사 일을 줄이고 더 많은 시간을 달리기에 쏟았다. 내가 사는 길은 오직 달리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5월 옥포조각공원에서 노동절 행사로 단축 마라톤이 열렸다. 규칙은 한 팀 다섯 명이 함께 들어와야 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잊고 홀로 내달렸다. 결국 팀은 7위였지만, 나는 가장 먼저 결승선을 끊으며 처음으로 달리기에 자신감을 얻었다.
이어 열린 ‘제1회 전사 체육대회’ 10㎞ 마라톤에도 출전했다.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선수도 아니니 부담도 없었다. 행여 꼴찌를 하더라도 괜찮다는 편안한 마음이었다. 사람들은 거제 최고의 주자 신승서 대리의 우승을 예상했지만, 그는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불참했다. 대회에선 갈증에 목이 타들어 가던 것 말고 기억이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사람들의 환호 속에 두 팔을 번쩍 들며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었다.
가을에도 행운은 이어졌다. 매년 10월 초에 열리는 장승포 시민의 날 행사에 옥포동 대표로 출전한 나는 처음부터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작전이고 뭐고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다른 주자들의 거리는 벌어졌고 결국 또 가장 먼저 결승선을 밟았다. 그렇게 나는 첫해에 세 번 연속 우승이라는 기적을 맛봤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열 가지 다 좋은 것을 주지 않으시나 한 가지 재주는 주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원망과 불평밖에 없었던 나에게도 최고의 선물, 작은 재주를 주셨다. 바로 달리기였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