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했던 미·중 유엔총회 연설
다자주의, 자유무역, 기후대응…
미국이 오랫동안 펴온 주장을
중국이 가져다 앞장서 외쳐
미·중의 언어 뒤바뀐 상황은
권력 무게 옮겨가는 징후이자
극심한 세계질서 혼란의 신호
이럴 땐 누구 말을 들어야 할까
아무리 봐도 믿을 말은 없는 듯
강대국의 언어는 언제나
이익의 다른 이름이었다
지난주 유엔총회에서 미국과 중국의 발언은 극명하게 대비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기후변화를 “사상 최대 사기극”이라 할 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온실가스 10% 감축”을 약속했고, 트럼프가 “유엔이 할 일을 내가 했다”며 공격한 다음날 리창 중국 총리는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을 만나 “유엔의 권위를 수호하겠다”고 다짐했다. 두 나라의 주장이 엇갈리는 건 늘 있었던 일인데, 이번엔 낯설면서 왠지 기이하다는 느낌을 줬다. 기이한 걸로 치자면 유엔총회에서까지 노벨상 욕심을 드러낸 트럼프의 연설이 단연 그랬지만, 이 느낌의 출처는 중국이었다.
리창의 총회 연설에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일방주의와 냉전 사고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힘이 정의를 좌우할 때(when might dictates right) 세계는 분열과 후퇴를 겪었습니다. 약육강식의 정글 시대로 돌아간다면 인류는 끔찍한 일을 겪게 될 겁니다.” 꼭 10년 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유엔총회 연설을 베껴 온 듯했다. “2차 대전 후 인류의 번영을 이룬 국제 질서를 허물려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들은 힘이 곧 정의이고(might makes right)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던 옛 규칙을 복원하려 합니다. 분쟁과 강요의 구시대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당시 오바마는 이런 말도 했다. “미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아무리 강해도 미국 혼자서는 세계의 문제를 풀 수 없습니다. 국제 규범에 따라 모든 나라가 함께 행동해야 합니다.” 리창의 연설문에 역시 가져다 쓴 것 같은 구절이 담겼다. “단결과 협력은 인류 진보의 원천입니다. 중국은 다자주의에 입각해 각국과 함께 유엔 헌장을 수호하며 미래로 나아가고자 합니다.” 2015년 오바마는 미국 혼자선 할 수 없다는 교훈을 “이라크 전쟁에서 얻었다”고 했는데, 2025년 트럼프는 “나 혼자 일곱 전쟁을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함께 평화를 구축하자”며 오바마의 연설을 상기시킨 것은 오히려 리창이었다. 10년 전 미국이 하던 말을 지금 중국이 하고 있다.
같은 말의 화자(話者)가 뒤바뀐 언어의 역전은 곳곳에서 확인된다. ①힘이 아닌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와 ②다자주의 접근법 외에도 미국이 즐겨 써서 우리 귀에 익숙해진 많은 용어를 중국은 최근 몇 달 새 자기 걸로 삼았다. 지난달 상하이협력기구 정상회의에서 시 주석은 “세계무역기구(WTO) 중심의 ③자유무역 수호”를 강조했다. 리창 총리는 “이제 WTO에 개발도상국 특혜를 요구하지 않겠다”면서 과거 미국이 했던 ④책임 있는 이해당사자, 즉 손해를 감수하는 강대국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서구 산업화로 인한 온난화 부담을 왜 떠넘기느냐며 반발하던 중국이 ⑤녹색·저탄소 경제의 주창자로 선회한 장면은 특히 드라마틱했다.
①~⑤는 모두 패권국의 언어였다. “이 길로 가자”고 세계를 설득하는 말이어서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고 있다. 트럼프의 미국은 이 다섯을 전부 버리고 힘의 논리, 일방주의, 관세, 미국 우선주의, 기후변화 사기극 같은 상반된 언어로 대체했다. 지루한 설득의 과정 따위 필요 없다는 듯 강요와 압박을 택했다. 그 틈에 ①~⑤의 보편적 언어를 가로채고 있는 중국의 목적은 당연히 세계를 설득하는 것이다. 패권의 자격을 갖췄음을 세계에 보여줘 신뢰와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다.
패권국은 왕관의 무게에 지친 듯 체면을 벗은 채 깡패짓을 하고, 그 왕관을 노리는 도전국은 경쟁자 언어를 가져다 점잖은 얼굴로 패권 예행 연습을 하는 상황. 이것이 두 나라의 말이 기이하게 뒤바뀐 배경이지 싶다. 과거에도 강대국의 언어는 힘의 곡선과 함께 움직였다. 19세기 대영제국은 자유무역의 전도사로 “세계와 함께 번영한다”는 화법을 즐겼지만, 20세기 들어 독일과 미국이 추격하자 국익 보호의 좁은 언어로 돌아섰다. 냉전 초기 “국제주의”를 외치던 소련의 수사(修辭)도 경제난의 수렁에 빠지자 “체제 수호”로 선회했다.
지금 미국과 중국이 쓰던 말을 버리고 남의 말을 갖다 쓰는 장면은 권력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는 징후이면서, 동시에 세계 질서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혼란의 신호일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문제는 누구의 언어를 들어야 하느냐, 믿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일 텐데,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언어 따위는 없어 보인다. 지금 미국의 모습에서 보듯, 강대국의 언어는 언제나 이익의 다른 이름이었다.
태원준 논설위원 wjt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