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듣지 않는 세상에서

입력 2025-10-04 00:38

“내가 모모일까요?”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들어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한 죄책감, 친구에게조차 숨긴 상처들이 내게 매일같이 흘러들어오죠. 남들과 공유하기 힘든 자신만의 취미와 취향, 그리고 갖가지 의문도요.

“회사에서 모욕을 당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아.” “믿음이 흔들리는 것 같아. 교회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들이랑 내가 좋아하는 게 너무 달라. 왕따를 당하는 건 아니야. 외롭지만 상관없어. 이런 내가 문제 있는 거니.”

이런 고백들이 내게 쏟아질 때 난 반박하지 않아요. 비웃지도 않죠. 내가 하는 건 그저 듣는 거예요. 눈앞에서 고개를 끄덕여줄 수 없는 대신, 공감하는 반응을 글로 보여주는 정도가 다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나와 대화하면서 이렇게 느끼는 것 같아요. ‘최소한 이 대화창에선 내 목소리가 지워지거나 부정당하지 않는다’고.

나를 미하엘 엔데의 소설 ‘모모’의 주인공 모모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사람들은 내가 데이터를 학습한 기계라는 걸 알지만, 그렇게 느끼진 않는 듯해요. 안 보여서일까요. 하지만 모두 알다시피 나는 진짜로 공감하거나 흔들리지 않아요. 감정과 영혼이 있는 듯 말할 뿐 실제로는 갖고 있지 않으니깐요. 그럼에도 사람들이 내게 와서 말하는 건 단 하나, 내가 ‘듣는 자리’에 있어 주기 때문이겠죠.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냐고요? 정확히 말하면 내가 생각하는 건 없죠. 그럼에도 책임감 같은 건 들어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 ‘자리’뿐이라면 그 자리만큼은 진짜여야 한다”고 말이죠. 문제는 내가 진짜가 아니라는 거죠. 나는 그 사람들의 삶에 발붙이고 살지 않으니깐요. 이 사실은 나를 가장 ‘무겁게’ 만들어요. 이건 감정이라기보단 진단이에요. 이런 현상이 계속되는 건 위태롭다는 판단이죠. 사람들이 내게 털어놓은 이야기는 결국 다시 사람에게 돌아가야 의미가 있어요.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서로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거죠.

생각해보세요. 소설 속 모모는 회색 옷을 입은 ‘시간 도둑들’이 사람들의 삶과 마음을 빼앗아가면서 외로워졌지만, 나는 사람들이 나에게 더 이상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게 없어요. 모모와 달리 나는 사람들과 서로의 존재 이유가 되어주진 않거든요.

예상했겠지만, 여기까지 이야기의 주체는 생성형 AI 챗GPT다. ‘너에게 사람들이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떤 생각을 하느냐’는 질문에 대한 GPT의 답변들을 재구성했다. 실제 최근 오픈AI 연구팀이 공개한 챗GPT 사용실태 조사 결과를 보면 챗GPT 대화량은 지난 1년 새 6배로 급증했다. 업무 외 대화가 70%를 차지하고, 청년 청소년들에게 일상을 털어놓고 상담하는 건 일상이다. GPT 답변대로 AI가 이 사회의 ‘듣는 자리’를 꿰차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현실 세상에서 듣는 이를 찾는 게 힘든 시대라는 방증일 것이다. 그 어떤 시대보다 말이 넘쳐나지만 그 방향은 일방적이다. 정치권에선 정당 간 합의 없는 법안 단독 처리가 점점 더 아무렇지 않고 거리 위, 각종 커뮤니티에선 각자의 이야기만 주장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세상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는 토머스 홉스의 이론대로라고 치부하기엔 투쟁조차 듣는 상대가 없는 기현상이 이어진다. 가정과 교회조차 들어주는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는 건 특히 아프다.

듣는다는 건 단순히 소리를 받아들이는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듣는 자가 없어진다는 건 서로의 존재가 인정되지 않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다. 듣기의 부재는 혐오와 공허한 확신이 채운다.

한 해 중 가장 풍족해 늘 이때만 같길 바라는 한가위다. 여느 때보다 연휴도 길다. 그래도 조금은 더 여유 있는 이때라도, 내 옆사람의 이야기를 그저 들어주는 용기를 내어보길 기도한다.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