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AI 배우

입력 2025-10-03 00:40

긴 갈색 머리에 영국식 억양을 쓰는 ‘여배우’ 틸리 노우드는 지난 5월 SNS 인스타그램에 계정을 열었다. 노트북이 있는 책상, 어질러진 침대 등을 올리며 일상을 공유했다. 최근 스위스 취리히 영화제에서 공식 소개된 그는 곧 기획사와 계약을 맺고 정식 데뷔할 예정이다. 스칼릿 조핸슨의 뒤를 이을 차세대 배우라는 평도 나왔다. 하지만 그는 네덜란드 배우 겸 프로듀서 엘린 판데르 펜덴이 만들어낸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AI) 배우다. 인간보다 더 완벽해 보이는 그를 보고 있자니, AI 배우가 스크린 주연으로 나설 날도 머지않은 듯 하다.

AI 배우란 실존하는 인간이 아니라 가상의 존재다. 딥러닝·생성형 AI가 인간 배우들의 영상과 음성을 학습해 표정·제스처, 말투와 감정까지 재현한다. 여기에 3D 모델링 컴퓨터 그래픽(CG)이 더해져 화면 속에선 실제 인물처럼 연기한다. 이전의 CG 캐릭터는 사람과 쉽게 구분됐지만, 이제는 거의 구별이 어렵다 보니 논란이 커지고 있다.

최근 미국 할리우드 업계 종사자들은 AI 배우 등장에 생계 위협과 예술성 훼손을 내세우며 강하게 반발했다. 배우인가 단순한 프로그램인가 하는 예술적 논란에 더해 심각한 노동권 문제까지 겹쳤다. AI 배우가 늘어나면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의 일자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AI 배우와 연기하는 상대 배우는 빈 공간이나 대역 배우를 보고 연기하게 된다. 연기는 호흡의 예술이다. 배우는 상대의 눈빛에 반응하며 순간순간 감정을 이어간다. 허공을 향한 연기는 긴장도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AI가 아무리 감정을 흉내 내도 그것은 기억된 반응의 재현일 뿐, 즉흥성·변주·눈빛 교환 같은 생생한 교류는 불가능하다.

AI 모델이나 가수는 이미 한국에서도 활동 중이다. 드라마와 광고 시장에도 곧 유사한 논란이 번질 것이다. AI 배우는 흥미로운 도전이지만,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무대 위 인간의 눈빛과 호흡만큼은 대체할 수 없다.

한승주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