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카톡 이거 뭐야?”
주말 아침 아내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카카오톡(카톡) 업데이트 이후 바뀐 ‘친구 탭’이 낯선 모양이었다. 과거엔 친구 목록에 동그랗고 작은 섬네일(미리보기 사진) 하나만 붙어 있었다. 그 사진을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었고 다른 사진을 보려면 앨범을 직접 열어 하나하나 화면을 밀어야 했다. 일종의 아날로그적 사생활 보호 기능이 작동하고 있던 셈이다.
그런데 업데이트 이후엔 타인의 프로필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화면을 차지하게 됐다. 과거에 올린 사진까지 타일처럼 한 번에 드러났다. 내가 조용히 바꾸고 싶었던 사진이 이제는 다른 사람의 피드에 무차별로 배달되는 꼴이 됐다.
적극적으로 눌러보지 않는 한 상대방의 일상을 보지 않아도 됐는데 이제는 원치 않아도 일상이 노출된다. 편안했던 간격이 갑자기 좁혀지면서 피로감으로 이어졌다. 이런 불편은 나만의 감상이 아니었다. 개편 직후 앱 마켓에는 평점 테러가 이어졌고 커뮤니티에는 ‘카톡 탈퇴 인증사진’과 라인·텔레그램으로 갈아타겠다는 글이 줄을 이었다. 결국 카톡 운영사인 카카오는 6일 만에 백기를 들었다. 기존 ‘친구 목록’ 방식을 되살리고 원하면 인스타그램식 피드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대화가 본질이던 메신저가 어느 순간 유튜브, 인스타그램을 흉내 내며 망가져 가는 현장, 묘하게도 이 사태를 보며 교회가 떠오른 건 왜일까. 얼마 전 고등학교 동창 Y에게 전화가 왔다. 지역의 한 대형교회에 출석하고 있다는 그가 전한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교회 담임목사의 설교가 점점 더 정치적으로 기울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 말씀보다 정치적 메시지가 귀에 박힌다는 그의 목소리엔 깊은 씁쓸함이 묻어났다.
Y는 “작년부터 젊은 부부들이 하나둘씩 교회를 떠나고 있다”며 오랜 시간 지켜온 공동체가 변질하는 걸 보는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흥미로운 분석도 쏟아냈다. “담임목사와 정치적 지향이 같은 이들이 주로 남았고, 같은 성향을 지닌 이들이 새로 유입됐어. 정치 발언이 노골적일수록 교회는 오히려 커진 것 같아.”
선명함이 성장을 가져올 때가 있다. 그러나 그 성장이 건강한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의 배부름은 다른 누군가의 굶주림 위에 세워지기 때문이다. 여우와 두루미가 번갈아 음식을 내놓던 오래된 우화가 있다. 긴 부리에 맞는 그릇이 나오면 두루미는 배부르지만, 여우는 굶었다. 얕은 접시가 나오면 이번엔 여우만 웃었다. 교회가 특정 진영의 언어만 내놓을 때도 그렇다.
담임목사의 정치 성향을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이들도 많다. 관심이 있다면 직접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원치 않는 이에게까지 설교를 통해 전해지는 풍경은 카톡 사태와 닮아 있는 듯하다.
통계 결과는 강단과 회중 사이에 놓인 깊고 아득한 강을 보여준다. 지난 4월 지앤컴리서치가 만 19세 이상 기독교인 1000명과 담임목사 500명을 대상으로 정치의식을 조사했다. “교회는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은 성도 52%, 목회자 28%였다. 성도는 불개입 성향이 우세했고 목회자는 적극 개입 성향이 두드러졌다.
한편 목회자 중 70% 이상이 “자신의 발언이 성도들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믿었다. 성도들이 느끼는 실제 영향력(34%)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차이가 난다. 성도의 47%는 “목회자·교인과 정치 토론 이후 관계가 멀어졌다”고 답했다.
물론 강단에 선 목회자들에게도 이유는 있을 것이다. 불의가 가득한 세상에서 교회가 침묵해서는 안 된다는 선지자적 소명감일 수도, 혹은 혼란스러운 시대에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는 책임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선한 의도가 공동체를 가르고 누군가를 밀어내는 방식이라면 우리는 그 방향 자체가 옳은지 물어야 한다. 안덕원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예배학 교수는 “정치적 편향성을 갖는 순간 설교자는 청중에게 ‘내 생각을 따라야 한다’는 암시를 주게 된다”며 “이는 예배의 본질에도, 목양적 배려에도 어긋난다”고 말했다. 그는 마르틴 루터의 말을 빌려 “예배의 본질은 하나님 말씀에 대한 응답과 찬양 외에는 없다”고 했다.
광의의 차원에서 우리 삶 전체가 정치적이기에 설교 중 정치 발언을 자제하란 말 자체엔 어폐가 있다. 그러나 종교적 언어는 본질적으로 더 정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을까. 신앙은 어느 한쪽만의 것이 아니며 교회는 모두를 위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