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빠져 여백의 시간 잃어버려…
추석 연휴에는 ‘디지털 미니멀리즘’ 실천을
추석 연휴에는 ‘디지털 미니멀리즘’ 실천을
강의를 하다 보면 가끔 학생이 밝게 미소를 지을 때가 있다. 잠시 착각한다. 내 강의가 그렇게 재미있나? 하지만 바로 깨닫는다. 지금 학생은 현실의 강의실이 아니라 디지털기기를 통해 다른 세계에 접속해 있다. 내 앞에 있는 건 그의 육체일 뿐 마음은 다른 차원으로 떠나 있다.
그걸 깨닫자마자 갈등이 시작된다. 그를 현실로 다시 불러와야 할까, 그냥 두어야 할까. 스마트폰과 태블릿이 늘 곁에 있기 때문에 학생들은 강의에 집중하다가도 쉽게 다른 세계로 갔다 돌아오곤 한다.
이제 강의실은 더 이상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다. 지식은 손쉬운 경로로 넘치도록 많이 흘러든다. 급변하는 세계, AI 혁신, 극심한 사회 갈등, 깊어지는 내적 불안까지, 전통적 교수법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가 돼버렸다.
달라진 세상을 살아갈 학생들이 대학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학문적 지식에 그치지 않는다. 좋은 삶을 꾸려갈 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할 능력, 복잡한 사회에서 자신을 지켜낼 역량을 키워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집중하고 생각하는 힘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정반대다. 강의실은 고요하다. 때로는 불편할 정도의 무반응이다. 청소년기에 코로나를 거친 학생들은 교수의 시선도 부담스러워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손바닥 안의 기기를 통해 끊임없는 자극과 연결돼 있다. 강의실의 고요는 사유의 침묵이 아니라 현실과 가상 세계를 오가는 분주함이 빚어낸 정적이다.
가끔 직접적인 충돌도 일어난다. 노골적으로 스마트폰에 몰입해 있는 학생을 호명하자, “교수님, 급히 문자를 교환해야 했고, 강의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선택을 했고, 성인으로서 그 책임도 제가 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처럼 긴장감이 흐르고, 모든 학생이 집중한다. ‘수업 중에 SNS를 할 자유’는 선택의 문제인가? 선택할 수 있다고 해서 정당화될 수 있는가? 다른 학생들의 학습을 방해한 책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오가면서 강의실에는 긴장된 생기가 피어난다.
강의가 끝난 뒤에 뜻밖의 일이 이어졌다. 어떤 학생이 “오늘 강의가 너무 재미있었어요. 늘 이렇게 토론하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아까 폰을 보던 학생도 와서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라며 사과를 한다. 해피엔딩이라 다행스럽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나 기성세대는 젊은 세대에게 불만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도 “요즘 젊은 선비는 글만 알고 예의는 모른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질적으로 달라진 점이 있다. 과거에는 기본적으로 기성세대의 권위가 유지됐던 반면 지금은 그 권위구조 자체가 무너졌다. 이제 기성세대에 대한 존경은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됐다. 더 큰 문제는 이런 변화 속에서 교수와 학생,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어떤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과 대화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스마트폰은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사람들은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디지털 자극으로 채운다. 지하철을 기다리는 몇 분, 음식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 심지어 영화가 시작하기 전의 몇 초까지도 비어 있지 않다. ‘여백의 시간’은 철저히 사라졌고, 생각할 틈새조차 메워졌다. 즉각적인 감정이 차분한 논리를 압도하며, 단편적 지식은 쌓이지만 깊은 이해는 멀어진다. 자극은 넘쳐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무기력만 깊어진다.
마침 긴 연휴가 다가온다. 쉴 새 없이 쏟아지던 콘텐츠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디지털 미니멀리즘’을 실천해볼 수 있는 기회다. 의도적으로 디지털 기기를 멀리하고 자극 없는 순간을 스스로에게 허락하면 좋겠다. 멍하니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이번 연휴에 자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선물이 될 것이다.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