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쉰 살에 아버지와 사별하고 여덟 남매를 눈물로 키우셨다. 새벽마다 밥을 짓거나 군불을 지피기 전, 먼저 무릎을 꿇었다. 나는 새벽잠이 없던 터라 그 기도를 다 들었다. “여덟 자녀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믿지 않는 자녀가 주님을 영접하게 하소서.” 그 간절한 기도는 공기 속에 오래 머물렀고 결국 하나님은 그 기도를 응답하셨다.
거제도에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나는 분지골에서 이어온 버릇처럼 산을 찾았다. 옥녀봉 자락에는 일제강점기 때 묻힌 산삼 씨앗이 서 말이나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는 그 뿌리를 찾아 숱하게 산을 헤집고 다녔지만, 끝내 빈손으로 내려올 뿐이었다.
그때 멀리서 울려오는 교회 종소리가 내게 진짜 보물이 어디 있는지를 속삭였다. 그러나 내 귀에는 그 울림이 축복이 아니라 대우조선 입사 때 ‘기독교인’이라 속였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빚 독촉처럼 들렸다. 괴로워서 종소리를 피하려 산속 더 깊이 들어갔지만, 이상하게도 소리는 더 크게 따라왔다. 돌이켜보면 그것이야말로 나를 불러내는 하나님의 손길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은 염광교회에서 만났다. 마라톤을 가르쳐주던 선배였던 신승서 염광교회 장로님이 초대장을 내밀며 “이웃사랑 대축제에 가자”고 했다. 처음엔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몇 달이 흘러 스물일곱 번째 생일에 나는 스스로 교회 문을 열었다. 주일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수요일 저녁 예배에서 바로 등록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날 이전의 나는 죽고 새로운 내가 태어났다. 교회에 등록한 뒤 예배와 기도, 성경이 하루의 숨이 됐다. 직장 점심시간에도 머리를 숙여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퇴근길에도 주머니 속 작은 성경을 펼쳤다. 일곱 권으로 나눠진 포켓 성경을 한 권씩 품에 넣고 다니며 꿀보다 은혜로운 말씀을 석 달 만에 온전히 채웠다. 성탄절에는 성경 다독상 1등을, 다음 해에는 전도상 1등을 받았다.
새벽 네 시 반이면 눈을 떴다. 독신자 아파트에서 교회까지 3㎞. 그 길을 달려가 5시 새벽기도에 앉았다. 예배가 끝나면 지하 청년회실로 내려가 성경을 읽었다. 해가 오르는 시간에 다시 뛰어 집으로 돌아왔다. 겨울 새벽, 차가운 공기는 숨이 막힐 만큼 날카로웠지만 그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내 안이 살아났다.
교회에 다니기 전 나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완악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회심 이후 나는 눈물 많은 사람으로 바뀌었다. 하나님은 나를 철저히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셨다. 더 낮고 더 겸손해지라고 모난 부분을 다듬어주셨다.
아버지의 기도, 어머니의 눈물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스물일곱 생일 처음 교회에 발을 들인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남을 해하거나 욕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 길 위에서 부모님의 삶을 닮아가고 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