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하던 더위가 언제였냐는 듯 지나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고 있다. 올 추석 연휴는 예년보다 조금 길어졌으니 여유 시간에 책 한 권 들어보는 것은 어떨지. ‘좋은 책’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니 남의 의견을 듣기로 했다. 오는 24일부터 파주출판단지에서 3일간 열리는 책 축제 ‘2025 파주페어-북앤컬처’에서는 ‘한 권 마켓’이라는 독특한 기획이 마련됐다. 참여 출판사 100여 곳이 자사가 출판한 딱 한 권만 팔 수 있다. 덤으로 ‘믿고 읽을 수 있는 다른 출판사 책’도 하나를 골라 홍보할 수 있다. 겹치지 않고 100여 권이 추천됐다. 그동안 ‘책과 길’을 피해 갔던 책 중에서 10권을 골라봤다.
채소생활자(김아영·수작걸다)
동물성 식재료 없이 채소로만 요리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제주도의 발효 채식 공간 ‘산토샤’의 셰프이자 채소생활자로 불리는 저자의 고민이 담긴 채소 요리책이다. 모유 수유로 고생하던 저자는 백일 간의 현미 채식을 실천한 후 고장 난 몸이 하나둘 정상 범주로 돌아오면서 간헐적 채식인에서 온전히 ‘채소생활자’로 살아가기로 했다. 언제든 구하기 쉬운 16가지의 제철 채소와 저자만의 특별한 발효 조미료 비법으로 건강한 계절의 맛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이 계절 가을의 식재료는 사과, 버섯, 당근, 두부. 그는 “지금 계절에 어떤 채소가 내 몸과 마음에 가장 필요한지를 알아차리는 것. 그게 요리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문학처방전(박연옥·느린서재)
인문약방 ‘일리치약국’에서 일하는 저자는 약사가 아니다. 문학을 전공했다. 세 번쯤 만나서 의뢰인의 질병에 관한 이야기를 공유하고 거기에 맞는 ‘문학’을 처방한다. 고혈압, 허리 디스크, 위암, 원형탈모 등 몸의 고통도 있었지만 산후우울증, 알코올의존증, 만성피로, 공황장애 등 마음의 병을 의뢰한 환자들도 꽤 많았다. 저자는 그들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그들이 앞으로 바라는 상황까지 촘촘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이야기를 듣고 고통 완화에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처방한 것이다. 만성피로에 시달리는 워킹맘에게는 정세랑의 ‘보건교사 안은영’,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초보 육아자에게는 박상영의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을 처방하는 식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가와우치 아리오·다다서재)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미술 작품을 감상할까. 작가가 태어날 때부터 시력이 전혀 없는 선천적 전맹(全盲)인 시라토리 겐지와 함께 일본 각지의 미술관을 함께 방문하며 작품을 감상한 경험을 기록한 논픽션 에세이다. 저자는 “그 사람과 함께 작품을 보면 재미있다”는 지인의 말에 시라토리를 만났다가 결국 2년 넘게 함께하게 된다. 시라토리는 눈이 보이는 사람과 동행해 작품에 관한 시각적 설명을 듣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작품을 감상해 왔다. 그 과정에서 대화는 미술의 경계를 넘어 예술, 인간, 사회, 역사, 장애, 정상성 등 다양한 주제로 확장된다. 그와 함께하면 세상을 바라보는 익숙한 시선도 변화시킨다.
틈만 나면 세계 일주(권보선·이곳)
대학교 2학년, 그저 시간이 남는다는 이유로 무작정 자전거 국토 종주를 다녀왔다. 자전거 여행에 빠져 대만, 유럽 7개국, 터키 전역을 자전거로 여행했다. 직장인이 된 후에도 공휴일이 주말 근처에 붙기만 하면 퇴근길에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38개국, 638일을 여행길 위에서 보낸 ‘프로 여행러’의 기록이다. 직장에 매여 예전처럼 자유롭게 떠날 수는 없지만 다시 떠날 궁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낯선 곳에서의 아침을 우리말이 아닌 다른 나라 말로 시작하기를 고대하고 있다”며 “그날이 올 때까지 일상을 여행처럼, 여행을 일상처럼 여행하듯 살겠다”고 말한다.
어떤 밤은 식물들에 기대어 울었다(이승희·폭스코너)
“세상으로부터 밀려나고 단절되었다는 생각으로 외로울 때 식물은 저의 연두를, 저의 연두색 손가락을 건네주었다.” ‘거짓말처럼 맨드라미가’ ‘여름이 나에게 시킨 일’을 쓴 시인 이승희의 첫 산문집이다. 시인은 마당의 식물들에게 시를 읽어주고, 라디오를 들려주고, 비가 오면 비를 맞혀주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시인은 자신이 식물을 보살핀다고 생각하지 않고 식물이 자신을 길들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식물은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는 짝이나 동무’다. 식물들은 시인에게 호들갑스럽지 않은 위로를 전하고, 슬픔의 모양을 빚어주고, 일상의 평온을 선사한다.
사라진 근대건축(박고은·에이치비 프레스)
디자이너 박고은은 20세기 중반 영화 속 낯선 건축물들의 현재 위치를 눈에 익은 지형지물에 근거해 추정해 보곤 했다. 그 일은 마치 지도 위에서 조각난 퍼즐들을 맞춰 보는 놀이 같았다.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서울에서 ‘사라진’ 근대 건축물을 하나하나 모아갔다. 일제강점기부터 1960~70년대 군사정부 시기까지 건축물에 얽힌 어두운 역사를 덧붙인다. 일제강점기 광화문을 밀어내고 들어선 조선총독부부터 6·25전쟁으로 파괴된 도심의 모습과 전쟁 이후 요새화 계획으로 만들어진 남산터널 등을 거쳐 군사 정권기에 이뤄진 도시 개발과 세운상가 건축, 폭력으로 얼룩진 중앙정보부 등을 다룬다.
서울 사는 나무(장세이·목수책방)
서울에는 사람만 사는 게 아니다. 나무도 산다. 책은 서울이라는 대도시에서 인간과 공존하는 나무들의 이야기다. 서울의 흔한 길과 그 길이 지나는 동네, 서울을 숨 쉬게 하는 작은 공원 등 서울이라는 공간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의 사연이 가득하다. 일제강점기에 처음 이 땅에 들어온 아까시나무는 박정희 정권 시절 대거 심어졌다 유해 수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서대문형무소가 있는 서대문독립공원의 ‘통곡의 미루나무’는 지척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소리를 묵묵히 듣고 견뎌온 가혹한 운명의 나무다. 나무가 인간보다 위대한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무너져가는 인간성이 다소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곳곳에 자리한다.
스물아홉 생일 1년 후 죽기로 결심했다(하야마 아마리·위즈덤하우스)
변변한 직장도 없고, 애인에게도 버림받았다. 혼자만의 우울한 스물아홉 생일을 보내며 깜깜한 터널 같은 인생에 절망한다. 죽음을 결심하지만 죽을 용기도 없다. 무심하게 눈길을 준 텔레비전 화면에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의 모습이 펼쳐진다. 그리고 결심한다.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고로 멋진 순간을 맛본 뒤에 죽는 거야. 내게 주어진 날들은 앞으로 1년이야.” 그렇게 마지막 꿈을 이루기 위한 스물아홉 여성의 치열한 1년간의 삶을 기록한 자전적 에세이다. 저자는 인생에서의 마법은 ‘끝이 있다는 것’을 의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철학자와 오리너구리(토머스 캐스카트·대니얼 클라인, 알키미스트)
‘편하게 웃으면서 읽을 만한 철학책은 없을까.’ 미국 하버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방송 작가와 코미디 작가로 활약한 두 사람은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떠올리고 의기투합, 온갖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편하게 철학을 가지고 놀기로 한다. 그렇게 개그 입문서인지 철학 입문서인지 모를 책이 탄생한다. ‘실패에 성공한 사람은 성공한 걸까, 실패한 걸까’ ‘외계인에게도 농담이 통할까’ ‘철학은 정말 말장난일 뿐일까’ ‘오리너구리는 오리야, 너구리야’ 등 독특한 질문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주제를 자유자재로 풀어낸다. 책을 읽어가면 어느새 형이상학부터 논리학, 윤리학, 현상학, 실존주의, 메타철학 등 주요 철학과 친해진다.
듣지 않는 자들의 공화국(일리야 카민스키·가망서사)
어느 날 바센카에 군대가 들어오고, 해산 명령을 거부한 농인(聾人) 소년이 총에 맞는다. 사람들은 저항의 의미로 군인들의 소리를 듣지 않기로 한다. 필요한 대화는 수어로 나눈다. 군인들이 듣지 않는 사람들을 체포하고 처형하면서, 긴장은 고조되고 억압은 거세진다. 청각장애인이기도 한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 시인 일리야 카민스키는 가상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폭력과 저항을 통해 인간성과 진실을 다시 묻는다. 중간중간 삽입된 수어 일러스트는 언어를 넘어선 소통의 힘을 웅변한다. 2019년 쓰인 작품은 마치 2022년 시인의 고향에서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예감한 듯하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