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계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로 불리며 자의적 적용과 남용 논란을 빚어온 배임죄가 도입 72년 만에 폐지 수순을 밟는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부는 배임죄를 과도한 경제형벌로 규정하고 폐지를 전제로 대체입법을 추진하기로 했다. 또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경제형벌 100여개의 규정 완화 작업에 즉각 착수하기로 했다. 기업의 경제활동을 위축하는 해묵은 규제를 걷어내겠다는 취지다.
기획재정부는 30일 당정협의를 거쳐 배임죄 폐지 등 110개 개선 과제를 포함한 ‘경제형벌 합리화 1차 방안’을 발표했다. 이재명 대통령의 경제형벌 규정 합리화 주문에 따라 정부가 지난 8월부터 경제형벌 합리화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한 지 약 2개월 만에 내놓은 첫 결과물이다.
TF는 책임주의 원칙상 형벌이 과도한지 여부, 행정제재 등으로도 입법 목적 달성이 가능한지 여부 등 5가지 잣대를 토대로 과제를 추려냈다고 밝혔다. 그중 최우선 개선 과제로 1953년 형법을 만들 때 도입된 배임죄 폐지를 지목했다. 이 대통령이 “배임죄가 남용돼 기업활동을 위축시키고 있다”고 발언한 점이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TF는 배임죄 1심 선고 판례 약 3300건을 전수분석한 결과 요건이 추상적이고 적용 범위가 지나치게 넓다고 판단했다. 기업 임직원 외에 부동산 매도인, 백화점 직원 등 민사 영역까지도 법이 적용돼 온 점을 참조했다. TF 관계자는 “기업들은 계약 체결 과정에서조차 배임죄 적용 가능성을 의식해 정상적인 경영 활동이 위축됐다”고 밝혔다.
정부는 배임죄 폐지 추진과 함께 신속하게 대체 입법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무작정 폐지할 경우 사업 기회 유용이나 가상화폐 범죄와 같은 새로운 경제범죄 등 중요 범죄에 대한 ‘처벌 공백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입법 방향은 처벌 요건을 명확히 하고 처벌 범위를 축소하는 데 맞출 계획이다. TF 관계자는 “특별법을 제정해 주체와 행위 요건을 한정하거나 기존 개별법에 처벌 규정을 넣는 방법을 검토 중”이라며 “상법·형법 전문가와 시민단체 등 전문가 그룹의 자문을 거쳐 세부안을 최대한 신속히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전문가들은 배임죄 폐지의 속도 조절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의 조영관 변호사는 “개선 필요성은 공감하지만 여야 합의나 사회적 논의 없이 추진되는 부분은 우려된다”며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종=신준섭 이누리 기자 sman32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