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는 내가 달리기 때문에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다고 짐작한다. 그러나 그 시작은 달리기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회심한 이후로 아버지는 평생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으셨다. 기도로 하루를 열고 성경으로 하루를 닫았다. 그 영향으로 나 역시 술과 담배를 배우지 않았다. 아버지의 신앙은 내 습관을 넘어 삶의 기초가 됐다.
아버지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 것은 윗새봉에 살던 상윤이네 가족 덕분이었다. 연풍교회 부흥집회에 참석한 뒤 아버지는 회심했다. 그날 이후 우리 집은 마을에서 유일한 기독교 가정이 됐다. 연풍 읍내 교회까지는 5㎞ 거리였다. 아버지는 새벽마다 그 길을 걸어갔다. 예배당을 다녀오는 길에는 비료 한 포대를 지게에 메고 곧장 밭으로 향하셨다. 젊은 시절 풍을 앓아 다리가 불편했지만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멀리서도 특유의 절뚝거림으로 아버지의 걸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다리가 아파 교회에 못 나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계곡으로 향했다. 집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직접 시멘트를 부어 만든 작은 기도터였다. 아버지는 그곳에 방석 하나를 펴고 무릎을 꿇었다.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계곡물 소리가 흐를수록 아버지의 기도 소리는 더 크게 울렸다. ‘아버지, 주여’ 하는 신령한 부르짖음은 산을 깨우고 마을까지 퍼졌다. 그 울림은 어린 나를 두렵게, 한편으로는 든든하게 했다. 비 오는 날이면 방 안에 낮은 책상을 펴고 성경을 읽으며 찬송을 불렀다. 기도와 찬송, 말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 집. 그것이 내가 자란 환경이다.
하지만 어린 나는 그 신앙이 버거웠다. 교회에 가기 싫어 산이나 저수지로 도망쳤다. 친구들과 술래잡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다 예배 시간에 맞춰 아버지가 없는 집으로 돌아왔다. 속으로는 세상 사람들이 다 교회를 가더라도 나는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고등학교 2학년 봄방학을 앞둔 어느 날, 담임 선생님은 얼른 고향에 가보라고 했다. 아버지가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위암 진단을 받았는데 이미 손쓸 수 없는 단계라는 소식이었다. 버스를 타고 울며 찾아간 집 마당에 이웃들이 모여 있었다. 낮게 깔린 웅성거림, 어머니의 부은 눈가, 서늘한 공기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나는 곧장 아버지의 기도터가 있는 계곡으로 올라갔다. 음지에는 눈이 녹지 않아 발이 푹푹 빠졌다. 저 아래 기도터는 텅 비어 있었다. 그곳에 있던 아버지는 없었다. 가족들의 눈물과 홀로 남은 어머니, 굴뚝에서 모락모락 오르는 연기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돌아보면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지 못한 철없는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끝내 내게 위대한 신앙의 본을 남기셨다. 각자 섬기는 모습은 다르지만 아버지만한 신앙의 사람은 만나지 못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25)
아버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이 땅에서 주어진 사명을 다 감당하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그 기도와 눈물이, 오늘도 나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가 됐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