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방황 끝 신앙·고독을 견고하게 지켜내다

입력 2025-10-04 03:24
‘가을의 기도’ 등 한국인들의 애송시로 사랑받는 김현승 시인의 생전 모습. 위키피디아 제공

역대급 폭염을 지나 가을이 왔다. 창조주의 어김없는 자연 운행 질서가 환하기만 하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등 가을에 생각나는 노래는 제법 많다. 그러나 가을에 떠오르는 시인은 단연 김현승(1913~1975)이다. 김현승은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평양 제주 광주로 옮겨 다녔다. 평양 숭실중과 숭실전문학교를 다녔고 말년에 재직하던 숭실대 채플 시간에 기도 중 쓰러져 소천하는 드라마틱한 생애를 살았다.

그의 삶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탕자처럼 신과의 끊임없는 갈등 그 자체였다. 그는 한 산문에서 ‘나는 원죄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반성과 참회를 노래하다가 점점 부정적인 데로 기울어져 갔다. 나의 신앙적 배반을 오래 참고 보시다 못하여 나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치셨다. 나를 다시 깨어나게 하시어 과거를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그리하여 나는 신앙을 회복하였다’고 썼다.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신앙에 충실했지만, 한때 신으로부터 멀어졌고, 끝내 신에 귀의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삶을 마감한 것이다. 신을 멀리하면서 고독을 탐구한 시집이 ‘견고한 고독’과 ‘절대고독’이라면, 다시 신에게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목소리를 담은 결과가 유고시집 ‘마지막 지상에서’였다. 김현승은 그렇게 신앙과 고독이라는 이율배반의 원리 안에서 평생을 살았다.

그가 가졌던 신성 추구의 열망이 자기 성찰의 자세로 나타난 작품은 대표작 ‘가을의 기도’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 작품에는 가을을 맞아 기도하는 시인의 경건한 자세가 나타나는데 절대자의 사랑과 은총에 순종하는 마음이 강하게 다가온다. 그는 홀로 남아 기도와 사랑을 간구하는 모습을 통해 본질만 남은 세계를 추구한 ‘가을의 시인’이었다.

어린 아들을 잃고 애통해하던 중에 쓴 ‘눈물’도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주시다.’ 시인은 꽃과 열매, 웃음과 눈물의 대립을 통해 삶의 역설적 가치를 노래한다.

마태복음에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자신의 눈물이 옥토에 떨어져 정화와 희생, 부활과 재생의 이미지로 이어져가기를 기도했다. 성경적 비유로 ‘나의 가장 나아종 지니인 것’이 눈물임을 노래한 것이다.

그가 평생 추구하고 노래했던 고독(Solitude)은 외따로 떨어져 쓸쓸함을 느끼는 외로움(Loneliness)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신을 향해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실존적 자각을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이 고독한 존재라는 것을 앎으로써 신과 자신을 알아간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세계가 절대자와 조용히 교류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정서적 상황이다. 그래서 신을 떠난 것 같은 고독에는 절대자를 소망하는 영혼의 모습이 역설적으로 담겨 있다. 김현승은 강렬한 시적 영감을 통해 고독을 탐구했지만 신은 다시 시인의 내면으로 고요하게 들어오신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극적인 그의 귀의야말로 우리 문학사에서 신에 대한 의식이 궁극적으로 가닿은 독자적인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일생을 치열한 자기 탐구로 보낸 그의 말년 작품들은 치열했던 갈등을 해소하고 신을 향한 평화로운 귀의의 세계를 펼쳐냈다. 그래서 우리가 가을에 김현승을 만나는 것은 신앙과 고독이 반대 방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을 향한 은총과 전율의 서로 다른 이름임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50주기를 맞아, 아름다운 가을을 맞아, 신앙과 고독을 견고하게 지킨 시인을 기리고 그린다.

한양대 국문과 교수·꽃재교회 장로